삼화페인트와 노루페인트는 70년을 이어온 경쟁관계다. 노루페인트는 1945년 설립된 해방둥이 기업이며, 삼화페인트는 이듬해인 1946년 설립돼 올해 칠순을 맞았다. 두 기업 모두 반백년 넘게 페인트 한우물만 판 데다, 2세경영 등 닮은 꼴 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만큼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페인트 업종은 소재 자체가 전방산업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삼화페인트는 B2C 등 사업다각화, 노루페인트는 글로벌 전략으로 돌파구 찾기에 나섰다. 이를 통해 전방산업 침체 속에서도 제2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우리나라 페인트산업 역사의 산 증인인 삼화페인트와 노루페인트를 집중 조명한다.(편집자)
건축용 도료 1위…'한우물 경영' 삼화페인트
해방 직후인 1946년 동화산업주식회사는 일본에서 배워온 페인트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국내 최초로 페인트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삼화페인트다. 고인이 된 김복규·윤희중 회장이 공동 창업, 반세기가 흐른 지난 2003년 두 사람의 아들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며 2세 경영이 시작됐다. 2008년 윤희중 회장의 아들 윤석영 대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김복규 회장의 아들 김장연 대표가 단독대표를 맡았다.
1950년대 당시 삼화화학공업. 사진/삼화페인트
회사는 1953년 '삼화화학공업'에서 1964년 '삼화페인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1966년에는 베트남에 국내 최초로 페인트 수출길을 열었다. 영광과 고난의 역사 속에 삼화페인트가 올해 70돌을 맞았다. 한국 페인트산업의 궤와 같이 한다. 장수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우물 경영'이 있었다는 평가다.
건축용 페인트로 시작한 삼화페인트는 오랜 경륜과 전문성을 무기로 건축용 부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붐이 일면서 건축용 페인트 업계도 덩달아 호황을 누리며 고성장을 이어갔다. 개발시대의 과실이었다.
호황 뒤에는 그늘이 있었다. 2009년부터 이어진 건설경기 침체로 시장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전방산업이 침체되자 소재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삼화페인트는 2010년 이후 기존 건축용 도료에 신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공업용 도료 시장을 개척했다. 특히 스마트폰용 페인트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2008년과 2009년 중국과 베트남 등에 스마트폰용 도료를 생산하는 해외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영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2010년 기준 공업용 도료의 매출 비중이 50%가 넘으며 회사의 주춧돌로 자리매김했다.
외형도 커졌다. 2000년 1414억원의 매출이 2005년 2200억원, 2010년 3840억원, 2014년에는 5270억원으로 늘었다. 수익성도 함께 개선하는 질적 성장도 이뤘다. 2000년 75억원이던 영업이익은 2005년 112억원, 2014년 458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그 사이 임직원도 950여명으로 늘었다. 삼화페인트는 현재 국내 5개, 해외 5개 등 총 10개의 법인(계열사)을 두고 있으며 국내에서만 대리점 800여곳을 운영 중이다.
'한우물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력은 필수다. 이는 곧 전문성을 의미한다. 삼화페인트 전체 인력중 30%가량은 연구개발(R&D) 관련직으로, 업계 최대 수치다. 연구개발 비용도 해마다 늘어 매출액의 4%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삼화페인트는 이 같은 전문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 확대와 함께 성장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김장연 대표는 창립 70주년 첫 해를 여는 자리에서 올해 사업목표로 ▲시장확대 ▲속도경영 ▲품질혁신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글로벌 파트너를 적극 발굴, 국내외 시장을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움직임도 구체화됐다. 지난달 말에는 UCH파트너스의 지분 61.5%를 취득하고 계열사로 추가했다. 신시장 진출을 위해 현재 키르기스스탄에서 사업을 진행 중인 UCH파트너스의 지분 인수를 전격 결정했다.
김 대표는 "시장의 요구와 환경 변화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고, 보고와 의사결정 시스템의 효율화를 통해 속도경영을 추진할 것"이며 "품질경영 기반의 엄격한 품질표준 제정과 시스템 구축을 완성하여 글로벌 삼화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고 다짐했다.
잉크에서 페인트까지…도전의 70년사 '노루페인트'
1945년 당시 대한오브세트잉크 정문. 사진/노루페인트
노루페인트의 설립은 삼화페인트에 비해 1년 앞선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노루페인트는 도료가 아닌 인쇄잉크로 사업을 시작했다. 한정대 선대회장은 당시 인쇄잉크의 공급난에 주목, 잉크제조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한 회장은 1945년 10월 서울 회현동 골목 일본식 목조가옥에 '대한오브세트잉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노루페인트의 시작이었다.
1945년 당시 대한오브세트잉크 정문. 사진/노루페인트잉크의 공급난이 일었던 1940년대와 달리 1950년대 들어서면서 인쇄업에 불황이 찾아왔고 대한잉크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도료의 시험생산을 이어갔다. 인쇄잉크와 도료는 생산시설과 제조과정이 거의 같아서 작업실과 설비를 구분하지 않아도 됐다. 도료의 생산 또한 수월하게 이뤄졌다. 1957년 미군에 도료를 납품하면서 도료의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노루표라는 브랜드가 처음으로 사용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산업화의 기치로 국가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뤘다. 1960년대 말까지 노루페인트의 생산제품은 합판용 도료를 중심으로 건축용 도료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아세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브랜드사에 자동차용 도료를 공급하는 등 공업용 도료의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내 조선업이 급성장하던 1970년대 후반 노루페인트도 선박도료와 특수도료에 뛰어들어 생산을 확대했다. 인터내셔날 페인트(IPC) 등 세계적인 선박도료 전문업체와의 합작을 통한 전략이 주효했다. 그 결과 1982년 수출의 날에 도료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2세 경영 역시 삼화페인트보다 빨랐다. 1988년 12월 한정대 창업주의 장남인 한영재 부사장이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2세 경영 체제가 갖춰졌다. 2000년 1월에는 한영재 회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2세 경영의 새 출발을 알렸다.
삼화페인트가 고성장을 이뤘다면 노루페인트는 완만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2000년 노루페인트의 연간 매출액은 2068억원으로 삼화페인트(1414억원)보다 앞섰지만, 2005년에는 비슷한 수준(노루 2370억원, 삼화 2200억원)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이후 2010년 3011억원, 2014년 4160억원으로 삼화페인트에 역전마저 내줬다.
2006년을 기점으로 삼화페인트의 실적이 앞서지만 사실상 단순비교가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노루페인트가 지주회사 체제로 운영되면서 건축용과 일부 공업용 도료를 제외한 나머지 플라스틱, 선박용 도료 등을 따로 분사시켰기 때문이다. 2006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이후 노루는 현재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노루페인트를 포함해 국내에만 10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2014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유가하락은 페인트 업계에 원가절감으로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고용과 투자의 축소, 중국경제의 경착륙, 유럽의 장기불황 등은 여전한 악재다. 무엇보다 경기 침체는 소비 부진을 불러와 전 산업군을 힘들게 하고 있다.
노루페인트는 70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력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노루페인트는 핵심 사업인 건축, 공업, 자동차보수용 도료 부분에서 경쟁력을 확고히 다지는 한편 인접 사업 영역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다양한 분야로 고객 접점을 늘려나갈 예정이다.
한영재 노루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70년간 응집된 우리의 도료, 수지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농생명 신사업의 기틀을 신속히 마련함으로써 신성장 동력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