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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Go,Go)도시 너머 마을, 종로구 창신동과 숭인동을 돌아
입력 : 2015-07-09 오전 6:00:00
서민화가 박수근이 살며 사랑하며 그림을 작업했던 창신동과 서민들의 삶이 공존하는 숭인동 동묘 벼룩시장을 돌아볼 셈이다. 창신동과 숭인동은 동대문 바깥 동네이다. 서울의 역사로 보면 성곽의 바깥에 자리한 동네이니, 도성의 외곽지대였다. 때문에 주민들은 성곽 밖 도시 너머 마을로 부르는데, 모든 역사의 경과에서도 외곽의 공간으로만 자리하여온 까닭이다. 서민적이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백성의 시대에도 그러했고, 노동자?농민의 시대에도 그러했으며, 중산층이라 높여 부른 때부터 지금까지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가난하고 배 고푼 서민들이 모여 살던 도시 너머 마을은 가진 자들의 역사 너머에서 잔여의 공간으로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절, 그 골목과 장터에서 서성였을 서민들의 걸음을 따라 걷는다.
 
한국적인 향토색이 가장 짙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 박수근은 52년부터 63년까지 창신동에 살았고 65년 지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수많은 서민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곳에 살며 골목을 오가고 장터에 주저앉은 서민들을 그렸는데, 대게가 아이들과 쪼그려 앉은 노인, 행상을 나온 여인네들을 모델로 하였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는데, 그가 그린 서민들의 모습은 비슷한 처지의 그를 닮은 서민들이었다.
 
도시 너머 마을, 창신동과 숭인동(사진=이강)
 
역사 밖에서 서성이던 서민의 동네
 
복원공사가 마무리된 동대문성곽구간을 올라 성 밖을 내려다보면 창신동과 숭인동이다. 멀리 시야가 확보되는 도심의 교차로에 한양도성의 동쪽 성문인 흥인지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옛 동대문야구장 자리에 들어선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보인다. 평화시장과 대형쇼핑센터 등 동대문 상가가 빙 둘러선 도심 교차로의 중앙에 흥인지문이 서 있는 모습인데 어깨를 잃어버린 장수처럼 무력하여 현재적 서울을 돌아보게 한다. 일제에 의해 도시계획이 재편되면서 조선 600년의 한양성곽은 군데군데가 단절되었는데, 후세에 이르러서도 성곽을 곧추세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흥인지문을 한 바퀴 오래도록 바라보고 낙산성곽 바깥에 자리한 창신동 방향으로 내려선다.
 
창신동과 숭인동은 동대문, 낙산성곽의 바깥마을로 도시 너머 마을로써 존재한다. 창신동은 종로구에 속하지만 경제적으로 동대문 상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창신동 골목길의 봉제공장과 문완구 상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까닭이다. 숭인동의 기점인 동묘 쪽의 골목은 주말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인다. 천천히 창신동 골목길을 따라 동네를 둘러보고, 동묘 벼룩시장까지 서민화가 박수근의 흔적과 옛 시절의 잔상을 더듬어 걷는다.
 
창신동 박수근 옛집 자리(사진=이강)
 
봉제공장 골목과 문완구거리로 불리는 창신동은 오래도록 많은 시간이 축적되어진 마을이어서 살림살이에 빈 여백이 없다. 가파른 언덕과 휘어진 골목길, 작은 공장과 가게들이 밀집된 모습은 빼곡하게 채워진 작은 상자들을 쌓아놓은 것과 같다. 숨 쉴 새 없이 살아온 서민들의 시간들이 정리할 틈도 없이 쌓여진 까닭이다. 오래도록 쌓여져 방치된 옛 시간의 기록이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지붕과 건물들은 귀퉁이를 돌아 박수근 화백이 살았다던 옛 집을 찾아본다. 박수근 화백은 이곳에 살던 시절에 작품의 대다수를 완성하였다. 당시 서울은 해방과 전쟁통에 엉망진창이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창신동과 숭인동은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터이자 일터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박수근 화백은 홀로 월남하여 군산항 부두에서 하역작업 등을 하다가, 이곳 창신동에 터를 잡았다. 청계천변을 따라 판자를 덧댄 판잣집들이 늘어가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그는 이곳 창신동에서 다시 가족들을 만났고 그때 처음 마련하여 돌아가기 1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 옛집이 있던 창신동 393-16번지에는 빈대떡집과 공인중개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박수근 가족은 1952년부터 63년까지 창신동에서 살다 전농동으로 이사해 65년 작고했다.
 
박수근이 그린 옛 골목과 장터를 찾아서
 
박수근 옛집의 터를 둘러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동묘벼룩시장이 자리한 숭인동이다. 동묘벼룩시장은 주말에만 열리는 장인데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저렴한 가격의 물건들과 구제라 불리는 재활용 의류들과 온갖 잡동사니들이 노상에 늘어서 있는 일종의 노천시장이다. 바로 인근의 서울풍물시장과 황학동 헌책방 골목과 함께 서울 도심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풍물시장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보물찾기를 권하는 만물상들과 희망의 뉘앙스를 담은 가게의 상호들이 서민들의 발걸음을 호객한다. 세상에 요지경에나 나올만한 진귀하고 오래된 물건들은 눈요기와 즐거움을 배가한다. 간혹 온전한 형태의 한국형 벼륙시장 구경을 찾아나선 외국인 관광객과 이주외국인들의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재활용 옷더미들이 쌓여진 더미 위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듯 '한 장에 1,000원, 여섯 장에 5,000원'하는 옷을 고른다. 도시 너머 마을, 그 잔여의 공간에서 서민들이 모여들어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잔술과 잔여의 휴일을 보내는 것이다.
 
숭인동 동묘시장의 풍경(사진=이강)
 
천천히 장터를 둘러보다보면 박수근 화백이 그렸던 그림 속에 서민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역사 밖에서 늘 서성이던 서민의 삶 풍경들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장터의 모습이 생경하지 않고 익숙한 것은 어쩌면 서민화가 박수근의 애상이 잔상처럼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민화가 박수근은 이렇게 살아있으며 붐비는 장터에서 정물같이 고여 있는 서민의 초상을 남겼다. 어린이와 길가의 노인, 행상을 나온 여인의 모습을 그는 하얀 여백의 공간에서 마주하듯 그려놓았는데, 한결같이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장터를 꾸리는 서민들의 풍경(사진=이강)
 
지난 5월 종로구민회관에서 종로구 주민들과 만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박수근 선생은 잘난 사람은 그리지 않았다. 사람을 그릴 때도 전부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 파는 사람들을 그렸지, 흔들의자에 멋있게 앉은 사람은 그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 그려진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마애불이 아니라, 마애인(磨崖人)이었다고 덧붙였다.
 
서민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그린 서민화가 박수근. 동묘시장을 걸어보니 박수근 화백이 그렸던 시절과 흡사한 풍경이 남아있는 듯하다. 자꾸만 졸음이 쏟아져 몸이 기우는 장터의 어머니와 잡동사니 잡화를 내어놓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박수근 화백의 그린 서민들과 중첩되어진다. 가난한 화가가 마주했던 서민들이 앉아있었을 그 골목에 영 다르지만은 않은 서민들이 또 장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박수근이 딸에게 선물하였다던 책가방, 아내의 꽃신을 닮은 뾰족 구두가 오랜 세월을 넘어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풍경. 서민들의 잔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장터에 삶을 치유하던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이강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ghang@hanmail.net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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