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따금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벌이는 점포가 있다. 할인율이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어서 한 번쯤은 돌아보게 된다. 진열된 상품 중에 사고 싶었던 물건이 있다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평상시엔 꿈도 못 꿨을 상품을 아주 싼 가격에 사들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좀 딱한 생각이 든다. 물건이 얼마나 안 팔렸으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이탈리아에서 겨울 대바겐세일이 시작된 로마 중심가의 쇼
팅 거리 비아콘도티가가 쇼핑을 위해 몰려나온 사람들로 북새
통을 이루고 있다. 로마와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은 일제히 대할인 행사를 시작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이런 우려와는 달리 미국의 경제 월간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재고 정리와 점포 폐쇄야말로 소매업체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심 전략이라고 지적한다. 재고 정리를 기업이 망하기 직전에 벌이는 고육책이라고 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실 재고 정리에는 여러가지 이점이 따른다. 기업은 우선 재고 정리를 통해 순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재고를 싼값에 방출하는 식으로 수익을 거둔 후 점포를 폐쇄하면 비용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 매출이 저조한 점포를 유지하려면 보관 비용과 영업비용, 판매 직원 인건비, 매장 임대료 등 엄청난 돈이 깨진다. 이럴 바에야 과감하게 재고 물량을 털어내고 철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
최근 의류 제조·판매회사 갭이 북미에 퍼져있는 675개 점포 중 175개를 폐쇄하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갭은 스태이플스, 오피스디포, 타켓, 라디오쉑 등 경쟁 업체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수익이 줄자, 인기 없는 점포를 아예 폐쇄해 버렸다. 전문가들은 점포 폐쇄를 제때 하면 순이익이 5%가량 증가할 수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블랙 프라이데이 같은 판매 특수 기간에 얻는 수익보다 점포 폐쇄로 얻는 수익이 더 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소매업체들이 매년 수백억달러의 재고를 헐값에 내놓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재고 정리는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체이스, PNC뱅크, 웰스파고와 같은 금융기관들은 소매업체에 대출을 해줄 때 재고 처리 능력을 평가한다. 그 결과 재고가 과도하게 쌓여있다면 담보를 더 많이 제시해야 대출을 해준다. 즉 재고 정리가 소매업체의 담보 부담을 줄여준다는 뜻이다. 소매업체들과 더불어 딜라드 백화점 (Dillard's)과 보네타베네타 백화점(Bottega Veneta), 약국체인인 라이트에어드(Rite Aid)와 대형 슈퍼마켓 체인 홀푸즈(Whole Foods)도 돈을 빌릴 때 재고 관리 능력을 평가 받는다.
신규 시장에 집중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상품은 인간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와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고 끝내는 생명을 다하는 수순을 밟는다. 노년기에 이른 상품 대신 새로운 상품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재고 정리를 한다고 무조건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니다. 너무 낮은 가격에 물건을 내놓으면 기업 이미지가 악화될 수 있는 데다 원재료 값도 못 건질 가능성이 있다. 할인 행사 후반부에 가서 추가로 할인율을 추가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 이때는 재고 물량을 다른 시장에 내놓는 방식을 취해야지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추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렇다고 할인율을 너무 낮게 적용하면 물건이 아예 팔리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싸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