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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자 “미쳐서 하는 공연..80세까지 하고파”
입력 : 2015-01-16 오후 6:20:23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손뜨개 모자 아래로 연보랏빛 머리칼이 삐죽 나온 사랑스러운 할머니. 숲 속 어딘가에서 오늘의 모험을 즐기다 나온, 연극 <해롤드앤모드> 속 여주인공 모드의 모습 그대로다.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분장실에서 이제 막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 박정자(74.사진)를 만났다.
 
귀여운 할머니 분장을 하고 있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게다가 연기 인생 50년이 넘은 연극계 어른. 여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목소리가 더해진다. 솔직히 고백했다. 떨린다고. 그러자 이 여배우는 눈을 지긋이 맞추고서 "떨리지, 그럼." 하며 소녀처럼 깔깔 웃어보인다. 다시, <해롤드앤모드> 속 모드의 웃음소리다.
 
(사진제공=샘컴퍼니)
 
박정자가 오는 3월 1일까지 열연할 연극 <해롤드앤모드>는 19세 소년 해롤드와 80세 할머니 모드 사이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국내 관객에게는 <19 그리고 80>이라는 제목이 더 익숙할 터. 원작자의 요청으로 이번 6번째 공연부터 제목이 바뀌었다. 2003년부터 연극과 뮤지컬로 제작됐으며, 6번째 해롤드 역은 tvN 드라마 <미생>의 장백기 역으로 이름을 알린 강하늘이 맡았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해롤드앤모드>는 배우 박정자에게 조금 더 '특별한' 공연이다. 박정자는 "이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미쳐서 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스스로 공연명 앞에 붙인 수식어는 '배우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다. 제작 여건만 허락한다면 80세까지 계속 공연할 생각이다.
 
<해롤드앤모드>에 이토록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의 내용도 매력적이지만 원동력은 역시 관객이었다.
 
"내가 무대에서 변하는 모습을 관객이 보고, 관객이 변하는 모습을 내가 무대에서 보면서 함께 동시대를 살아간다라는 게 소중해요. 우리는 다 소멸되긴 할텐데 그런 가운데 이 연극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어느덧 올해로 74세, 목표로 삼은 80세가 머지 않았다. 80세 때 이 공연을 어떤 모습으로 준비할 지에 대해 물으니 "사실은 공연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못한다는 게 아니라 환경을 만들기가 그렇단 얘기예요. 연극을 제작할 여건, 자금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또 제일 중요한 건 문제는 '19세'예요. 19세의 해롤드 역할을 맡을 친구가 열심히 찾아보면 또 있기도 하겠지.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어떤 인기나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에 길들여져 있고, 또 소속사라는 게 그들을 자유롭게 못하죠.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출연 중인 강하늘 배우가 '예쁜' 이유다.
  
"이 공연을 하고 싶다 할 때 '맘 놓고 하십시오, 80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러닝메이트가 있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어요."
 
(사진제공=샘컴퍼니)
  
박정자는 이번 공연에서 배우 강하늘 외에 양정웅 연출가와도 첫번째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그동안 연극 <14인 체홉>, <단체의 신곡> 등에서 젊은 연출가, 중견 연출가와 두루 호흡을 맞춰왔다. 비슷한 연령대끼리 모이기 십상인 요즘 연극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비결이 궁금했다. 들어보니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출연을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고.
 
"젊은 연출가들이 사실 저를 겁내 하는데 저는 항상 열려 있어요. 나는 닫혀 있는 사람이 아니야(웃음). 닫혀 있다면 그랬으면 벌써 무대를 내려 왔었어야 했겠죠. 누구하고도 작업할 생각이 있는데 오히려 젊은 친구들은 어렵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작업을 하다가 안 맞는 부분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내가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 세상에 신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늘 인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늘 부족해요. 좋은 점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감사해야 하고, 또 조금 부족한 게 있다면 우리가 서로 대화를 통해서 소통을 하면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배우 박정자와 함께 작업할 연출가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듯하다. 배우 박정자가 롱런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욕심, 연기 욕심이기 때문이다. "난 연출자에게 바라는 게 많아요. '바람 좀 더 날려줘, 날 좀 더 둥둥 떠다니게 해줘' 라고 하죠.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서요. 요구하는 게 많죠. 근데 그게 결국은 관객한테 보여지는 거니까. 우리는 보여지는 일을 하니까. 굉장히 욕심이 많고 유난스럽지, 나란 배우는."
 
욕심 많은 여배우지만 동시에 연극계의 어른이다보니 연기 외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박정자는 10년째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혹시 여러가지 책임들이 연기하는 데 방해된다고 느끼지 않냐고 물었더니 박정자는 다시 한 번 <해롤드앤모드> 속 모드가 되어 답변했다.
 
"공연에서 꽃을 보고 모드가 얘기하죠. '수만가지의 꽃이 있지 않나, 이 꽃들이 다 다르잖아, 난 이 꽃들이 다 사람들처럼 보인다'고요. 각자 한 명 한 명이 절대적인 개체인데, 이 말인즉슨 자기가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내야 한다는 거예요.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죠. 오늘 내가 무대 위에서 내 역할을 충분히 해내야 하는 것처럼요."
 
올해 박정자는 <해롤드앤모드> 이후 지방 공연을 돌고, 10월에는 국립극단의 연극 <키 큰 세 여자>에 출연한다. 스케줄이 적지 않음에도 박정자는 여전히 무대와 공연에 목마른 모습이었다. "올해도 초청을 받으면 언제라도, 울릉도라도, 제주도라도 갈 생각이 있어요. 문제는 누군가가 나를 불러줘야 한다는 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콜' 했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백' 하겠다고(웃음)." 일상이 아닌, 무대에서 모험하는 일이 제일 신난다는 배우 박정자가 욕심 나는 연출가라면 주저하지 말고 일단 '콜'부터 해 볼 것.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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