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경제민주화가 위기를 맞았다. 지나친 경제 위기감에 파묻혀 자칫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가 새해 벽두부터 제기되고 있다. '위기 속 위기'다.

국내 주요그룹 총수들은 2일 저마다의 신년사를 발표했다. 삼성·현대차·SK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위기' 일색이었다. 매출 200조원, 영업이익 30조원 시대를 열어젖힌 삼성전자마저 불투명해진 대내외 여건에 대한 우려로 가득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이날 신년사를 통해 "세계 경제는 올해도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며 "삼성의 앞길도 순탄치 않으며 험난하고 버거운 싸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2013년은 유럽 재정위기와 글로벌 경기침체 영향으로 국내외 시장 환경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며 내실경영을 주문했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또한 "예측하기 힘든 앞으로의 경영환경에서 이제 1등이 아니면 성장이나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냉엄한 현실"이라며 현실을 직시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요 그룹들이 앞 다퉈 위기의식을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생존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다.
유럽의 재정위기가 여전히 진행형인 데다 미국이 간신히 재정절벽 위기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앞날을 담보할 수준은 아니다. 장기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 역시 세계 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 동안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중국 등 신흥국마저 성장 엔진이 녹슬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내수마저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다. 기업으로선 성장을 위한 두 날개(수출·내수)가 꺾인 셈이다.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경쟁력을 채근하기 위해 뱉은 신년사가 아니라는 게 해당 그룹들의 설명이다.
문제는 위기감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시대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가 좌초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규제를 강화해 투자와 일자리의 발목을 잡아야 하겠느냐는 반론이 이미 개진되고 있다. 또 다시 성장 지상주의에 갇혀 기형적 구조를 이어갈 것이란 예상 또한 지배적이다.
박근혜 당선자가 후보 시절부터 경제위기를 강조하며 경제민주화를 한발 크게 후퇴시킨 것 또한 이런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대목이다. 정권의 토대가 되는 보수 기득권층과 무리하게 맞서가며 개혁의 칼을 빼들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미 순환출자 금지 등 당내에서 공론화됐던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방안마저 없던 일이 됐다. 가공자본을 통해 형성된 의결권은 1% 남짓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동네골목 구석구석 발을 뻗은 폐해의 원천이었다.
재벌그룹들이 한숨 크게 돌리고 재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년 시무식에서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불합리한 법령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 초기 '비즈니스 프렌들리' 재연인 듯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 그룹 총수들이 위기의식만 강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협력사들과의 상생을 말하기도 했다. 다만 새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만큼 일종의 눈치 보기라는 지적도 팽배한 게 사실이다.
경제위기 속에 기존의 주장이 되풀이되면서 경제민주화가 설 자리는 왜소해졌다. 그 사이 대선 기간 쏟아져 나왔던 국민의 열망과 바람은 한줌 '재'가 되고 있다. 민생은 여전히 힘들고, 추운 거리 위로 내몰리고 있다. 2013년 새해를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