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임차인'의 사전적 의미는 '돈을 내고 물건을 빌려 쓰는 사람'이다. 연극 <임차인>에서 임차인의 의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그저 잠시 빌린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극 전반에는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외로움과 소외의 정서가 흐른다.
<임차인>은 고(故) 윤영선 작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마지막 희곡이자 마지막 연출작이다. '2012 윤영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연출가 류주연이 이 작품을 정보소극장 무대에 올렸다. 류 연출은 공연을 올리며 윤영선 작가의 마지막 공연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공연 스태프들에게 연락해 여러가지 세부사항들을 적극 문의했다는 후문이다.
극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상황이, 2장에서는 말의 미묘함에 대한 탐색이 돋보인다.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1장 및 2장과는 달리 3장과 4장은 각각 은유적, 몽환적 분위기로 전환된다. 공통점은 이 극에서의 소통이 모두 일방향이라는 것이다.
1장의 경우 극의 제목처럼 실제 임차인이 등장한다. 장면은 이사 온 세입자와 집주인 간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무대 삼면에는 나무가 그려진 캔버스가 걸려있고 정면에는 나무 프레임으로 만든 문이 하나 놓여 있다. 1층에 거주하는 집주인이 문간에서 2층 세입자의 이사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극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점은 세입자와 집주인 모두 임차인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를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 구조 속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인간 공통이 겪는 외로움의 문제로 확장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가 임차인인 셈이다. 양쪽 모두, 공간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공간을 서성이며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2장에서는 택시기사와 손님이 등장한다.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 모두 소중한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새벽녘에 택시를 잡아 탄 손님은 수다스러운 택시기사의 말 폭탄에 쉴 새 없이 시달리며 고독할 권리를 빼앗긴다. 집안사정 때문에 열흘 남짓 만에 운전대를 잡은 택시기사는 집에 두고 온 아내 때문에 마음이 불안한 상태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이 사내는 끊임없이 손님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불안을 달랜다.
3장에서는 어느 부부와 '게'가 등장한다. 바닷가에서 게를 잡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우연히 만난 한 사내와 술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 사내가 술에 취해 바다에 뛰어들어 옛 여자를 부르자 남자는 그만 게가 들어 있는 봉지를 들고 집으로 슬그머니 돌아오고 만다. 게는 남자가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에 대한 상징이다. 집에 돌아오니 낮에 잡아온 게 중 단 한 마리만 살아 남아 있다. 남자의 부인은 게를 두려워하며 그만 내다버리라고 말하지만 남자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저한다.
마지막 장은 고향에 돌아온 한 여자가 폭설로 차 사고를 겪게 된 후 어렸을 적 키우던 개를 만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죽은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죽은 개의 혼령을 만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어찌됐건 여자는 환희라는 이름의 개를 만나 댐을 건설하느라 수몰된 고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추억이 환희를 통해 되살아 나고 이 모습은 무대 뒷편에 세워진 박스 속에서 마치 그림자극처럼 환상적으로 묘사된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장르적 특성을 띄고 있어 관객들은 극을 통해 작가 윤영선의 역량과 작품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결국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인간의 다양한 외로움과 소외다. 특히 장면 사이의 짧은 암전 때마다 등장인물이 한 명씩 등장해 냉장고에서 약을 꺼내 먹거나 물을 꺼내 마시는 대목에서 이러한 극의 의미는 더욱 강화된다. 벗어날 수 없는 짙은 외로움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 연극이다.
작 윤영선, 연출 류주연, 출연 정은경, 박혁민, 이태형, 최원정, 이반석, 심아롱, 드라마터그 이성열, 무대 손호성, 조명 김성구, 음악 이준혁, 21일까지 정보소극장.
윤영선페스티벌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