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현대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감각기관은 시각이다. 접근하기 쉬운 데다 구체적이라는 장점 덕에 시각은 우리 문화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시각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감성의 영역에서는 청각이 우월하다. 직관적이면서도 빠르게 파고드는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접근할 수 없는 추상의 깊은 영역까지 도달한다.
각종 이미지가 넘쳐 흐르는 세상의 흐름에 반해 예술계 일각에서는 청각을 시각중심 문화의 대안 혹은 보완물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특히 이같은 흐름은 소리와 퍼포먼스 형식을 혼합한 장르인 사운드아트에서 두드러진다. 사운드아트는 감각기관 사이 힘의 균형을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이자 일종의 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사운드아트의 관건은 시각 위주의 관습을 깨는 것이다. 의외의 재료가 무대에 자주 등장하며, 익숙한 악기를 쓰더라도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연주방식 대신 새로운 연주법을 모색한다. 지난 19~21일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제2회 즉흥음악 페스티벌 '닻올림픽'에서는 사운드아트의 이같은 특성을 유감없이 엿볼 수 있었다.
◇ 새로운 소리를 찾는 예술가들의 모임
"텅, 텅, 퉁, 텅". 축제 장소인 문래예술공장에 들어서려는데 바로 옆 건물 '아주철강'이라는 이름의 철강소에서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지나쳤던 금속의 둔탁한 소리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운드 축제인 '닻올림픽'의 전주곡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즉흥적으로 빚어내는 풍경'이 곧이어 '닻올림픽'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닻올림픽'은 사운드 아티스트 진상태씨가 소형 공연장 겸 레코딩 스튜디오인 '닻올림'에서 공연을 통해 틈틈이 모은 돈과 온라인 소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통해 모은 자금을 종자돈으로 삼아 개최한 즉흥음악 축제다.
진씨는 올해로 2년째를 맞는 이번 축제를 소개하며 "'닻올림'에 모이는 연주자들의 수가 어느새 12명에서 34명으로 늘었다"면서 "이번 공연은 닻올림을 1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얻은 결과물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축제에는 오대리, 이옥경, 류한길, 진상태, 최준용, 홍철기, 박다함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사운드아티스트 외에 알프레드 23하르트, 칼 스톤, 알레산드로 보세티, 마키노 타쿠마, 마티야스 에리언, 마야 오조히니크, 마티야 쉘렌더 등 해외 사운드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 물질의 고유한 소리, 해방되다
공연장에는 책상이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 있다. 스피커, 엠프에서 나온 선들은 모두 정돈된 흔적없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다. 관객은 마치 사운드아티스트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기분으로 공연장 좌석에 앉는다. 잠시 후 사운드아트의 다양한 양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동시에 귓속에 울려퍼진다.
특히 독일 출신의 멀티미디어 작가인 알프레드 23 하르트(A23H)와 미국 출신 작곡가인 칼 스톤이 결성한 '기프트 피그(Gift Fig)'의 연주는 '닻올림픽'의 지향점을 가장 명확하게 엿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A23H는 3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금관 나팔을 손에 잡고 책상에 놓인 마이크 앞에서 연주한다. 그런데 무대에 울려퍼지는 것은 멜로디가 아니다. 색소폰의 키를 누를 때 나는 달그닥거리는 소리, 숨이 들고 나는 소리, 활로 금관악기를 긁어내는 소리 등 금속의 물성이 느껴지는 소리만이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다. A23H가 연주하는 동안 협연자인 칼 스톤은 랩탑 컴퓨터 앞에서 또 다른 종류의 노이즈를 생성한다. 아주 느리게 조정된 목소리 샘플링, 오래된 턴테이블을 틀 때 나오는 잡음과 유사한 소리들이나 전자 건반소리를 짧게 끊어놓은 듯한 소리들이 무대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70년대 카트리지 타입의 데크를 쓰는 오대리의 무대도 인상 깊었다. 전자오락실의 조이스틱을 떼어다가 데크에 연결하고 초록색 막대와 빨간 단추들을 조종한다.
스피커로 터질 것 같은 노이즈 사운드가 나오는데 가만 들어보면 온갖 탈 것들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스포츠카가 전속력으로 달릴 때 나는 모터소리, 헬기장에서 들을 수 있는 굉음 등 회전하는 물체가 공기와 마찰해 내는 소리가 다양한 주파수를 넘나들며 연주된다. 내고자 하는 소리와 연주방식이 재치있게 어우러져 재미를 준 공연이었다.
알레산드로 보세티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를 라이브로 믹싱했다. 보세티는 사운드 조종도구로 키보드를 선택해, 마치 소리로 글을 쓰는 듯한 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트림소리를 아주 느리게 늘인 소리, 짧은 단어나 문장을 녹음한 소리 등이 연주자의 타이핑을 통해 재생되고, 연주자는 마이크 앞에서 '이, 아'하는 단발마 같은 소리를 라이브로 내며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식이다.
연주자와 녹음된 소리들의 상호작용은 구절이나 문장을 만들어낼 때 절정에 달했다. 녹음된 소리가 '그녀의 신경계(her nervous system)'라는 운을 떼면 연주자는 일정한 리듬 속에 ''그녀의 신경계(her nervous system)'라는 말은 그녀의 몸(system)이 예민하다(nervous)는 것을 의미한다'고 받고 결국 진지하게 공연을 보던 관객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언어의 권위가 소리에 의해 유쾌하게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다소 미흡한 준비로 공연 중간중간 작은 사고들이 있었지만 '즉흥'을 표방하는 축제의 성격 덕에 공연감상을 크게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진행된 페스티벌 '닻올림픽'은 소리를 질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 해방감을 관객에게 전이시키기에 충분한 공연이었다.
(사진=정경용, 닻올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