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메일
페이스북 트윗터
보이지 않는 벽
입력 : 2026-10-20 오후 5:48:02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국기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개발도상국이 발전하지 못하는건 자본도 교육 수준도 정부의 역량도 모두의 책임이 공존한다. 그러나 빈곤의 원인을 국가 내부에서만 찾는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하더라도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26년 10월, 개도국의 부채 문제가 다시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25년 공적개발원조는 실질 기준 전년보다 23% 감소했다. 역대 최대 낙폭이다. 같은 해 개발도상국의 대외부채 잔액은 12조3000억 달러로 전년보다 약 5080억 달러 증가했다. 발전에 필요한 자금은 줄어드는 반면,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는 상황이다.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세계의 기아와 빈곤을 자연적 불행이나 개별 국가의 무능력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국제경제질서와 권력관계가 빈곤을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지글러에 따르면, 가난은 단순히 가진 것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원을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을 축적하며 스스로 발전의 방향을 결정할 기회가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부채는 이러한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가 보건과 교육, 산업 기반에 투자하려면 재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 수입의 상당 부분을 부채 상환에 사용한다면 미래를 위한 투자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높은 차입 비용과 부채 부담까지 겹치면 발전의 여력은 더욱 좁아진다. 원조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빈곤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모든 빈곤을 국제경제질서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각국 정부의 정책과 제도, 부패와 분쟁 역시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국가 내부의 책임만 강조하면 왜 어떤 국가는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더 비싼 비용으로 조달해야 하는지, 왜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남는다.
 
보이지 않는 벽은 발전을 금지하는 명시적인 규칙이 아니다. 부채 상환에 밀려나는 교육 예산, 줄어드는 개발 재원, 미래를 위해 투자할 선택지의 축소처럼 경제적 조건 속에서 작동한다. 그 벽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국가의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쉽게 가려진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논한다는 것은 부족한 자원을 채워 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어떤 국가는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어려운지, 국제사회의 지원이 끝난 뒤에도 성과를 유지할 조건은 마련되어 있는지 물어야 한다. 빈곤을 극복하려면 가난한 국가에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기에 앞서,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환경인지 살펴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벽을 넘는 일은 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이혜지 기자 zizi@etomato.com
이혜지 기자
SNS 계정 : 메일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