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이후 가전과 철강, 자동차 등 한국 산업 전반이 유가 상승으로 고초를 겪고 있지만, 일부 업종은 역으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항로 우회로 운임이 상승한 해운업계와 운항 기간 증가로 선박 수요가 늘어난 조선업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수혜 업종으로 분류되면서도 정부의 손실 보전 대상에 오른 곳이 있다. 중동·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해외 주요국의 대체 공급망으로 부상한 국내 정유사들이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사진=뉴시스)
정부는 정유업계를 위해 약 4조원대의 손실 보전을 검토하고 있다. 중동 전쟁 이후 유가 상승이 국민 부담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면서 정유사들의 수익성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경유 등 석유제품의 해외 수출까지 제한되면서 정유사들의 경영 여건도 악화했다. 정부는 이 같은 부담을 고려해 일부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정부가 특정 품목에 상한을 설정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역시 1997년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이다. 국제 유가 상승이 중동 전쟁 등 외부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유업계가 최고가격제를 수용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런 정유업계가 최근 국정감사에서 뭇매를 맞았다.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의 석유제품 가격 담합 혐의가 불거진 결과다.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22년 2월부터 양사의 가격 담합이 이뤄졌다고 발표하고, 담합 관련 매출이 4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손실 보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담합으로 부당 이득을 취했다면, 업계가 산출한 손실액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 역시 국정감사에서 “담합이 인정돼서 부당하게 형성된 가격이 확인되면 그 가격을 손실보전 산정에서 제외하고 반환할 의사가 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담합으로 왜곡된 가격이 (손실 보전액) 산정에 반영되면 결국 국민 세금으로 부당한 이익까지 보전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고도 비판했다.
이미 공정위 담당 부서는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에 대해 시정조치와 과징금 부과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제출한 상태다. 손실 보전액을 논의하던 기업들이 조 단위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도 있는 처지에 놓였다. 현재 거론되는 과징금 규모도 4조원대로 손실 보전액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담합 의혹에 대한 최종 판단과 별개로, 실추된 업계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과제로 떠올랐다. 책임 공방에 그치기보다 근본적인 우려를 해소할 제도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 가격 결정 과정부터 정유사와 주유소 간 거래 관행까지 포괄하는 쇄신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