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종로사거리에서 긴팔 옷을 입은 시민들이 길을 걷고 있다. (사진=뉴시스)
누가 우리에게 '갓생'을 살라고 했는가.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출근 전 공부하고, 퇴근 후 자기계발까지 하는 삶은 어느새 '잘 사는 삶'의 한 형태가 됐다. 반대로 그렇게 살지 않는 날에는 별일이 없어도 뒤처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갓생을 살지 않는다고 누군가 우리를 나무란 적은 없다. 실패했다고 선언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한다. 갓생이면 대단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기준'을 받아들였다.
불안이 커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취업이 어렵다면 자격증을 더 따고, 경쟁에서 밀리는 것 같다면 경력을 더 쌓고, 미래가 불안하면 돈을 더 모은다. 노력은 분명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문제는 사회의 불확실성까지 개인의 노력으로 설명하기 시작할 때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이유도, 주거비가 부담스러운 이유도, 경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유도 어느 순간 '내가 더 준비하지 못해서'라는 말로 바뀐다. 사회가 던진 문제에 개인이 답안을 제출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불안한 시대일수록 자기계발의 언어는 더 강해진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바꾸는 대신, 바꿀 수 있는 나부터 고치면 된다는 생각은 가장 손쉬운 해답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회가 더 이상 기준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의 압박에는 그것을 요구하는 주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압박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몸, 더 많은 돈, 더 부지런한 하루를 원하는 것이 모두 개인의 선택으로 포장된다. 그러다 보니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도 사회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 개인의 욕망처럼 내면화된 것이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과 모든 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데, 둘 사이의 경계는 흐려졌다. 그렇게 불안은 밖으로 향할 곳을 잃고 안으로 들어온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익숙해진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살라는 조언도, 반대로 갓생을 그만두라는 선언도 아닐 것이다. 먼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기준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질문에 앞서 '나는 왜 이것을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게 됐지'라고 물어야 한다. 갓생이 대단하고 그렇지 못한 삶이 하찮다고 말한 사람은 없는데, 우리는 왜 자연스럽게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을까. 내가 세운 목표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일 수도 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관리하는 시대라면, 불안의 원인을 개인에게서만 찾는 것 역시 또 다른 불안의 시작일 수 있다. 불안으로 뒤덮인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완벽한 내가 아니라, 나를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만든 기준을 의심할 수 있는 시선인지도 모른다.
이혜지 기자 ziz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