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친구 중에는 부모님의 소득이 꽤 높지만, 집안 지출도 많아 정작 생활에 여유가 없다고 느끼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종종 "부모님이 부자지, 내가 부자는 아니다"라며 손사레를 쳤습니다. 실제로 용돈도 따로 받지 않아 씀씀이가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필 비슷한 소득 수준의 친구가 '엄카(엄마 카드)'로 마음껏 소비하는 편인지라, 유독 위축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소득이 높다고 해서 여유롭게 사느냐. 아닙니다. 중산층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대대손손 가난한 기자 눈에는 두 친구 모두 거기서 거기처럼 보였습니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대한민국 '진짜 중산층' 25% - 소득에서 노후준비까지, 중산층의 새로운 조건' 리포트를 내놓고 '진짜 중산층'을 가르는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소득·소비·저축·순자산·부채·노후준비인데요. 소득·소비·저축은 현재의 생활 수준을, 순자산·부채·노후준비는 이 생활을 앞으로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입니다.
먼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8.6%가 중간소득계층입니다. 이를 가구 단위로 적용하면 전체 가구의 52.9%가 소득 중산층에 해당합니다. 균등화 가처분소득 중위값은 연 3744만원으로, 중산층 범위는 연 2808만~7488만원입니다.
하지만 소득이 있다고 해서 그만큼의 생활 수준을 실제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주거, 식생활, 의료, 교육, 문화·여가 등 삶의 질은 '소비'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연구소가 계산한 균등화 소비지출 중위값은 연 2089만원입니다. 이 가운데 75%인 1567만원 이상을 '중산층다운 최소 소비수준'으로 제시했습니다.
동시에 현재의 소비생활을 미래에도 이어가려면 일정 부분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김 연구위원은 소비지출 후 처분가능소득의 10% 이상을 남길 수 있는 가구를 '저축여력이 있는 가구'로 분류했습니다. 적정 소비와 저축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한 가구는 전체의 53.2%입니다.
순자산도 따져보면 김 연구위원은 순자산 P50~P80, 즉 자산을 적은 순서부터 줄 세웠을 때 중간값부터 상위 20% 진입선까지인 2억3860만~6억9432만원을 '자산 중산층' 범위로 봤습니다. 이 구간에 해당하는 가구는 전체의 30.0%였습니다. 소득 중산층이면서 자산 조건까지 동시에 충족하는 가구는 19.5%로 좁습니다.
다만 자산의 액수만 많다고 충분한 것도 아닙니다. 은퇴 후에는 집값보다 실제 생활비로 바꿔 쓸 수 있는 금융자산의 역할이 큽니다. 연구소가 분류한 '진짜 중산층'의 금융자산 중앙값은 1억1230만원입니다. 이는 전체 가구 6312만원보다 높습니다. 금융저축도 9000만원으로 전체 가구 4400만원의 두 배를 웃돌았습니다.
부채 역시 절대적인 규모보다 갚을 능력이 중요합니다. 김 연구위원은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처분가능소득의 30% 이하이거나 상환액이 없는 경우를 부채건전성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진짜 중산층'은 부채가 있더라도 소득과 자산에 비해 상환 부담을 상대적으로 낮게 관리하는 가구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관문은 노후준비입니다. 아무리 지금 잘 벌고 잘 써도 은퇴와 동시에 생활 수준이 떨어진다면 지속가능한 중산층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연구소 기준에서 노후준비 조건을 충족한 가구는 전체의 47.4%에 그쳤습니다. 미은퇴 가구 가운데 노후준비가 '잘 돼 있다' 이상이라고 답한 비율은 9.6%입니다. 은퇴 가구의 55.6%는 생활비가 부족하거나 매우 부족하다고 답했습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을 순서대로 적용하면 중산층의 범위는 급격히 좁아집니다. 소득 기준으로는 전체 가구의 52.9%가 중산층, 적정 소비까지 충족하면 43.2%, 저축여력까지 더하면 39.9%로 쪼그라듭니다. 여기에 자산·부채·노후준비 세 조건 가운데 최소 두 가지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는 기준까지 적용하면 '진짜 중산층'은 전체 가구의 24.6%만 남습니다.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구는 고작 8.0%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채워 '진짜 중산층'이 돼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을 겁니다. 기자부터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분위를 나누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중산층 여부를 가늠하는 것보다는 내 소득에, 내 팔자에 맞게 쓰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또 남길 수 있는 돈을 만들어 빚과 노후를 감당할 수 있게 관리하는 것도요. 그렇게 지금의 생활을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다면 굳이 '중산층'이라는 이름표가 없어도 충분히 멋진 삶일 거라고 믿습니다.
(자료=2025 가계금융복지조사 마이크로데이터(국가데이터처),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장선영 기자 line0@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