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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프라임] 바나나 리퍼블릭
브랜드 이름도, 열대 사파리 여행도 아니다
입력 : 2026-09-11 오후 5:28:59
[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밀밸리에서 출발한 의류 브랜드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깔끔한 셔츠와 재킷, 여행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디자인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해준다.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다수는 이 패션 브랜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 패션 의류 브랜드에 무덤덤한 사람이라면 뜨거운 열대의 나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바나나가 많이 나는 중미 어느 국가를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세련된 브랜드 이름도, 사파리 여행도 아니다.
 
1954년 과테말라를 둘러싼 이야기다.
 
 
2024년4월1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바나나를 구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당시 과테말라에서 미국계 다국적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는 바나나 산업을 넘어 철도와 항만·수출망 등 핵심 경제 기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가 공개한 자료에서도 이 회사의 토지와 경제적 영향력이 과테말라 정치의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한다.
 
강대국 자본과 외국기업이 중남미 소국의 정치와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국가의 자율성이 흔들리던 시대. 훗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나나 공화국’이었다.
 
1951년은 전환점이 된 해다.
 
자코보 아르벤스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과테말라는 본격적인 개혁의 길로 들어섰다. 아르벤스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편중된 토지 소유구조를 바꾸기 위해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1952년 제정된 농지개혁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유휴·미경작 토지를 수용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상 역시 법에 따라 이뤄졌지만 유나이티드 프루트와의 충돌이 심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회사가 세금 신고 과정에서 낮게 신고했던 토지가액을 기준으로 보상액을 산정했고 회사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실제 유나이티드 프루트 토지의 일부는 농지개혁에 따라 수용됐다.
 
합법적인 토지개혁을 둘러싼 갈등은 곧 냉전으로 돌아왔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치며 합법적이고 온건한 토지 개혁을 ‘공산주의 침투’로 포장했다. 
 
 
과테말라 제25대 대통령 자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재임 1951년~1954년)의 모습. (사진=과테말라 정부 공식 기록물)
 
미국 정보기관은 이미 농지개혁법이 만들어지기 전인 1951년부터 아르벤스 축출을 위한 비상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 국무부가 훗날 공개한 문서는 당시 워싱턴이 아르벤스 정부를 점점 더 ‘공산주의의 교두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 인물들과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오래된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달레스는 과거 월가의 법률회사 설리번 앤드 크롬웰에서 활동했고 그의 동생 앨런 달레스도 이 회사에서 일했다. 
 
설리번 앤드 크롬웰은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법률 업무를 맡은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후 앨런 달레스는 CIA 국장이 됐다. 이런 기업과 워싱턴의 연결은 훗날 미국의 과테말라 정책을 둘러싼 이해관계 논쟁의 핵심 소재가 됐다. 기업의 이해관계와 냉전의 공포 정치가 겹쳐진 순간이었다.
 
1954년 CIA는 비밀공작 ‘피비서세스(PBSUCCESS)’를 가동했다. CIA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세력이 온두라스에서 과테말라로 진입했고 라디오 선전과 심리전, 공습이 이어졌다. CIA 문서에는 과테말라군 내부의 이탈을 유도하고 정부 인사들의 충성을 흔드는 공작 계획도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1954년 6월 27일 아르벤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미국 국무부가 공개한 역사자료는 PBSUCCESS를 CIA가 실행한 아르벤스 정부 전복작전으로 명시하고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는 무너졌고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이끄는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르벤스 정부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은 상당 부분 폐기됐고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통치와 정치적 폭력이 이어졌다. 1960년 내전이 시작된 뒤 1996년까지 36년간 이어진 무력충돌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장면을 지켜본 한 청년이 있었다.
 
 
체 게바라 모습. (사진=알베르토 코르다 촬영)
 
당시 26세의 아르헨티나 청년, 에르네스토 게바라였다. 오늘날 그를 ‘체 게바라’라고 부른다.
 
젊은 의사였던 게바라는 이미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빈곤과 질병,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는 1953년 말 과테말라에 도착했고 아르벤스 정부의 개혁을 직접 지켜봤다. 
 
과테말라는 그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왜 선거로 집권한 개혁정부가 외부의 압력 앞에서 무너지는가. 왜 중남미 한 국가의 정치적 선택에 미국의 이해관계가 그토록 강하게 개입할 수 있는가. 게바라는 이 질문들을 현실에서 마주했을 것이다.
 
과테말라 경험이 그의 정치적 급진화를 결정지은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테말라가 게바라에게 중요한 분기점이 됐을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는 분명하다. 이후 그는 무장투쟁이 사회변혁의 현실적 수단이라고 더욱 강하게 믿게 됐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1955년 두 사람은 만났고 이듬해 게바라는 쿠바혁명군에 합류했다. 1956년 12월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했고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리고 1959년 1월 쿠바혁명은 승리를 거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과테말라에서 봤던 장면과는 정반대인 1959년 쿠바혁명의 성공기. 미국이 자국 기업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과테말라 공작이 역설적으로 20세기 가장 강력한 반미 무장 혁명가를 탄생시킨 셈이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
이규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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