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C(기업소비자간거래) 제품은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업그레이드를 미룰 수 있잖아요. B2B(기업간거래)는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인프라 수요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비싸다고 안 살 수가 없어요. 지금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으면 영원히 뒤처지는 거예요.”
지난달 경기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산업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만난 글로벌 기업 관계자는 빅테크 기업들의 설비투자(CAPEX) 경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인공지능(AI) 시대는 업계의 예상 시점보다 훨씬 빨랐으며, AI 서버 수요 역시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큰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AI 칩을 파는 회사가 고객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그 돈이 다시 제품 구매로 돌아오는 ‘순환투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실리콘밸리에 이렇게 투자하지 않는 회사는 없다는 전언이다.
실제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금액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 4사의 실적 발표 내용을 보면, 이들이 제시한 올해 CAPEX 합산 전망은 무려 7200억~7450억달러(967조8240억원~1010조7415억원)에 달한다. 특히 AI 서버에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비롯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가 다수 필요한 만큼, 메모리 지출을 중심으로 이들의 투자 금액이 급증하는 추세다.
글로벌 투자은행(IB) UBS에 따르면, 빅테크 4사를 포함한 상위 11개 하이퍼스케일러의 메모리 지출은 지난해 728억달러(약 98조7677억원)에서 올해 3356억5700만달러(약 455조4865억원)로 증가하고 내년에는 7613억1700만달러(약 1033조1071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같은 기간 전체 설비투자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율도 14%에서 38%, 73%로 상승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같은 수요에도 “내년이 최악의 해”라고 불릴 만큼 메모리 업체들의 공급 여력은 빠듯한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고객사들은 메모리 사용량을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메모리 사양을 낮추는 식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구글은 AI 추론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인 키밸류(KV) 캐시를 압축해 D램의 연산 부담을 줄이는 ‘터보퀀트’ 기술을 공개했으며,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 울트라’에 탑재되는 HBM 용량을 기존 HBM4E 12단에서 HBM4E 8단 제품으로 낮추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5년 단위 장기공급계약(LTA)으로 물량을 확보할 정도로 메모리 수요가 높은 점은 분명하다. 다만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은 결국 빅테크 기업들의 메모리 사용량 축소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지금의 수요가 중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투자 시계를 앞당겨야 할 시점이다.
이명신 기자 s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