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납품업체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추진되는 대금 정산기한 단축 법안이 오히려 중소업체의 판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2소위원회는 최근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연 매출 1000억원 이상 유통업체의 직매입 대금 지급기한을 상품 수령일로부터 현행 최대 60일에서 35일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특약매입·위수탁·임대을 거래 역시 판매 마감일로부터 40일에서 20일로 단축한다.
법안 추진의 배경에는 2024년 티몬·위메프 사태가 있었다. 당시 납품업체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중요했다. 이를 고려해 정부도 납품·입점업체의 권익 보호와 거래 안전성 강화를 위해 대금 지급기한을 단축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모든 거래의 정산기한을 일률적으로 앞당기는 것이 과연 중소 납품업체에 최선의 해법은 아니다.
특히 직매입 거래는 중개거래와 성격이 다르다. 유통업체가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직접 매입해 재고 부담을 떠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상품을 매입한 뒤 판매해 현금을 회수하기 전에 납품업체에 지급해야 하는 기간이 짧아지면 그만큼 운전자금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가령 기존 60일 동안 활용할 수 있었던 매입대금을 35일 안에 지급해야 한다면 유통업체는 부족해진 자금을 자체 현금이나 차입 등으로 메워야 한다.
결국 유통업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은 크게 세 가지다. 매입 규모를 줄이거나, 재고 부담이 낮은 상품 중심으로 매입하거나, 거래처를 보다 보수적으로 선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중소, 신생 납품업체다.
대기업 브랜드나 판매 회전율이 높은 상품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매출이 기대되지만, 인지도가 낮은 중소 브랜드는 판매량을 예측하기 어렵고 재고 부담도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유통업체 입장에서 운전자금 부담이 커질수록 굳이 판매 가능성이 불확실한 상품을 대규모로 직매입할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
중소 납품업체 입장에서는 정산기간이 60일에서 35일로 줄어드는 것보다 유통업체의 발주가 줄어드는 것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한 번 거래가 끊기면 35일 만에 대금을 받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법안은 ‘정산 안정성’과 ‘판로 확대’라는 두 가지 중소기업 보호 정책이 충돌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정산기한을 단축해 납품업체의 현금 흐름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하다. 특히 유통업체의 경영 악화나 파산으로 납품대금을 떼일 위험을 줄이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정산기한만 기계적으로 줄인다고 중소 납품업체의 경영 안정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통업체의 매입 여력이 줄어 중소업체가 대형 유통망에 진입할 기회를 잃는다면 정책의 취지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정책의 목적이 중소 납품업체 보호라면 정산기한을 일률적으로 줄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거래 유형과 유통업체의 자금 여력, 상품의 판매 회전율 등을 정교하게 고려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이혜현 기자 hyu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