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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외주화
입력 : 2026-08-31 오후 2:19:35
(이미지=ChatGPT)
 
요즘은 굳이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전화번호는 연락처에 저장하고, 일정은 캘린더가 알려줍니다. 사진은 클라우드에 올라가고, 오래 전 대화도 검색 몇 번이면 다시 꺼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점점 기술에 외주화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머릿속에 모든 것을 담아둘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스스로 기억하는 것은 줄었지만 우리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잘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진첩은 '몇 년 전 오늘'을 자동으로 보여주고, SNS에는 오래전 게시물이 남아 있습니다. 메신저를 찾아보면 잊고 지냈던 대화도 그대로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헤어진 사람과의 사진도, 실패했던 순간도, 그때는 심각했지만 이제는 잊고 살던 일도 데이터에는 선명하게 남습니다.
 
과거에는 기억하려면 노력해야 했고, 잊는 것은 자연스러웠는데 어쩐지 지금은 반대인 것 같습니다. 기억은 자동으로 되고, 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진을 직접 지우고, 오래된 게시물을 정리하고, 보고 싶지 않은 '추억'을 숨겨야 합니다. 내가 이미 잊은 일도 데이터는 계속 기억합니다. 망각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능력에서 어느새 데이터 관리의 문제가 된 셈입니다.
 
우리는 흔히 망각을 인간의 결함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망각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들었던 일이 조금씩 흐려지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부끄러웠던 과거가 희미해지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특정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워주는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처음 봤을 때는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화처럼 뇌에서 기억을 지우는 기술은 아직 없지만, '망각을 관리해야 하는 사회'는 이미 어느 정도 시작된 것 아닐까요.
 
우리는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사진과 대화, 문서와 위치를 기술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남기 시작하자 이제는 반대로 무엇을 지울지 고민합니다. 언젠가는 기억을 남기는 기술보다, 원하지 않는 기억을 사라지게 해주는 기술이 더 각광받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기억되는 시대가 오자, 이제는 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전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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