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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잊혀져가는 역사
입력 : 2026-08-14 오후 6:31:15
광복절을 앞두고 최근 연예계가 시끄럽습니다. 배우 하영의 증조부를 둘러싼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입니다. 그와 반대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다시 조명하는 기사와 영상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니 어린 시절 집안 어르신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군산과 인접한 곳입니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호남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거점이었던 만큼 곳곳에 당시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강제 징용 거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명절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면 가끔 일본에서 할아버지의 친구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할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무심코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일제강점기를 직접 살아간 사람들의 증언이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그 친구분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제 동원됐다고 합니다. 이후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친구 분은 일본에 남았습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 하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친구 분과 함께 강제 동원돼 배를 타러 가던 길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논두렁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배가 고팠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발견했고 허겁지겁 입에 넣었습니다. 그때 먹었던 풀이 그렇게 달고 맛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문득 그때 먹었던 풀이 생각나 다시 찾아 먹어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억 속에서 그렇게 달고 맛있었던 풀은 정작 쓰고 맛이 없었다고 합니다. 풀이 달았던 것이 아니라 배고픔이 그렇게 느끼게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신기한 옛날이야기 정도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떠올려보면 역사책의 몇 줄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배고픔과 고통이 담겨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외할머니에게도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일본놈들이 말이야."라고 말을 시작하셨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허나, 이제는 그 이야기를 직접 해주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계시지 않습니다.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푸념처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집안 어르신들도 한 분씩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생생한 기억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주로 기록으로 남은 인물과 사건을 중심입니다. 하지만 역사서에 이름 한 줄 남지 않은 수많은 사람도 일제강점기를 살아냈고 저마다의 고통과 삶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의 역사는 공식적인 기록보다 가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기억에는 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경험한 세대가 사라지고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다음 세대마저 나이가 들면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이제 기억나는 것은 몇 장면뿐입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다시 조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동시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채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조금이나마 남겨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논두렁에서 허기를 견디다 뜯어 먹었던 풀 한 포기의 맛처럼 개인에게 남겨진 작은 기억도 그 시대를 설명하는 역사의 한 조각입니다. 그 기억을 들려줄 사람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기록해둬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말모이' 스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신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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