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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금수저 사이
입력 : 2026-08-13 오후 5:36:16
‘수입 오렌지족의 입장을 사양합니다.’
 
1994년 서울랜드 정문에 붙어 있던 안내문입니다. 화려한 옷차림과 튀는 행동을 일삼는 부유층 유학생들이 가족 단위 놀이공원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모의 부를 제 것인 양 과시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에도 선망보다는 조롱과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올드머니'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일군 성취보다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배경이 더 근사한 자기소개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직업과 재산은 물론 조부모의 이력까지 자신의 매력을 높이는 ‘금수저 마케팅’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서울랜드가 오렌지족을 문밖에 세웠던 시대를 지나, 이제 미디어는 금수저를 앞줄에 세웁니다.
 
최근 한 연예인이 집안의 배경을 자랑하다 조상의 친일 행적까지 알려지며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집안의 이력이 개인의 매력을 높이는 홍보 수단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입니다. 이런 ‘금수저 마케팅’이 통하는 데에는 계층 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체념도 한몫하는 듯합니다. 실제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사회조사에서 19세 이상 국민의 57.7%는 노력하더라도 본인 세대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이 낮다고 봤습니다.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높은 곳은 언젠가 도달할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올라가도 닿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곳은 그저 올려다보는 풍경일 뿐입니다.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출신과 가문은 그래서 더 희소한 스펙처럼 소비됩니다. 결국 올라갈 수 없다는 체념은 기울어진 사다리를 바로 세우기보다, 애초에 위에서 태어난 사람을 선망하게 만듭니다.
 
물론 조상의 잘못이 후손의 책임일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상의 업적 역시 후손의 스펙일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물려받은 것은 자산이지 성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경계를 너무 쉽게 허뭅니다. 부모의 재산과 직업, 오래된 집안의 명성을 개인의 매력과 능력인 양 소비합니다. 거기에 기꺼이 프리미엄도 붙입니다. 그렇게 태생은 사람의 가치를 설명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 사실만으로 관심과 호감, 권위까지 얻는 셈입니다. 세습은 물려주는 사람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물려받은 것에 값을 매겨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더 높은 값을 매길지 정하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오렌지족을 문밖에 세울 필요도, 금수저를 맨 앞줄에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태어난 자리보다 살아오며 만들어낸 자리에 더 높은 값을 매기는 사회면 충분합니다.
 
(사진=챗GPT)
이하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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