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기본소득 논쟁은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 미래전략 논쟁이었다. 당시는 미래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된 AI 대전환. 대한민국은 이 파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지난 4년 동안 국회 정무위와 산자위에서 이 문제를 고민해 왔던 김종민 의원이 7회에 걸친 연재 기고를 통해 대한민국 미래전략 '대전환 뉴딜'을 제안한다. 여러 쟁점에 대해 다양한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회장이 지난달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금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의 가장 큰 불안이 숨어 있다. 단 두 회사가 코스피의 절반을 떠받치는 나라다. 이 외다리가 흔들리면 어떻게 되는가. 반도체 경기가 고꾸라졌던 2023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15조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을 냈고, 법인세 납부 1위이던 이 회사가 52년 만에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못했다. 그해 나라 살림에는 56조원이 넘는 역대 최대의 세수 구멍이 났다. 두 기업의 사이클이 곧 국가 세입의 사이클이다. 게다가 중국은 국가의 돈을 쏟아부어 메모리 반도체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호황은 영원하지 않고, 추격자는 빠르다. 우리는 계속 벌 수 있는가.
부의 쏠림을 비판해 온 연재가 왜 '버는 이야기'부터 하는가. 대전환 뉴딜은 성장 없는 분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눌 것을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는 나눌 방법을 설계하는 일도 공허하다. 초격차 기술에 성공해야, 초격차 민생을 극복할 수 있다. 다만 어떻게 벌 것인가와 번 것이 누구에게 돌아가게 할 것인가, 이 두 질문을 처음부터 함께 놓아야 한다. 그것이 지난 반세기의 성장 전략과 대전환 뉴딜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기업 대항전이 아니라 생태계 대항전이다
오늘의 신기술 경쟁은 더 이상 기업과 기업의 싸움이 아니다. 국가가 뒤를 받친 산업 생태계끼리의 싸움이다. 엔비디아 뒤에는 미국 정부가, TSMC 뒤에는 대만이, 중국 기업들 뒤에는 국가자본이 서 있다. 링 위에 오르는 것은 기업이지만, 링 밖에서 체급을 만드는 것은 국가다. 판돈이 기업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빅테크 한 곳의 연간 투자액이 한국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전체의 몇 배다), 수출통제 같은 지정학 리스크는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판을 만들었다. 그래서 국가 경제의 미래에 꼭 필요하지만 기업 혼자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는 영역에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장기 자본을 대는 것, 그것이 전략투자다.
"혁신은 민간이 하고 국가는 비켜서라"는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 경제학자 마추카토가 『기업가형 국가』에서 밝혔듯,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만든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음성비서 중 국가가 돈을 대지 않은 기술은 하나도 없다. 국가는 시장의 훼방꾼이 아니라 첫 번째 투자자였다. 이제는 세계의 표준이다. '시장에 맡기라'던 국제통화기금조차 산업정책을 공식 감시 대상에 올렸는데, 2023년 한 해에만 2500건 넘는 산업정책이 쏟아졌고 절반 가까이가 미국·EU·중국의 것이었다. '국가가 비켜서 있는 시대'는 끝났다. '국가가 베팅하는 시대'가 왔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5월14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의 명소 톈탄공원을 방문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은 주주가 되고, 중국은 판을 깐다
미국은 반도체법으로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안기더니, 이제는 아예 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사들였다. 보조금 주는 국가에서 주주가 되는 국가로 진화한 것이다. 미국 안에서도 논란거리지만, 국가가 판에 들어왔다는 흐름만은 분명하다. 국방부는 희토류 기업 MP머티리얼스의 지분 15%를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구글, 아마존, MS, 메타 네 회사가 AI에 쏟아붓는 돈은 2026년 한 해에만 7000억달러를 넘본다. 사실상 국가급 베팅이다.
중국은 국가 반도체 펀드에 100조원 넘게 쏟아부었고, 그 결과 메모리 기업 CXMT가 삼성·SK·마이크론의 3강 과점을 깨기 시작했으며, 전기차 배터리는 이미 중국 기업들이 세계의 70%를 차지한다. 유럽은 2000억유로 규모의 AI 투자 계획을 내놨고, 일본은 라피더스에 정부 돈을 쏟아붓는다. 흐름은 분명하다. 국가가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나라들만이 앞서가고 있다.
한국도 출발했다. 세계 두 번째의 AI 기본법, 150조원 국민성장펀드, 20조원 국부펀드 구상. 이재명 대통령도 AI 시대의 초과이익 문제를 시대적 과제로 들며 "미래를 위해 투자할 때"라고 했다. 맞는 방향이다. 그러나 세 가지가 약하다. 국가 지원이 여전히 두 회사로 쏠리고(외다리를 굵게 만들 뿐 다리를 새로 놓지 못한다), 실행력이 부족하며, 우리는 미국식 재정 화력도 중국식 국가자본도 없는 중간국가다. 그래서 더더욱 '전략'이 승부처다.
"관치의 부활 아니냐"는 걱정에는 이렇게 답한다. 전략투자는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못 하는 고위험·장기·인프라 투자를 감당하는 것이다. 시장의 일은 시장에, 국가의 일은 국가에. 운용의 모범인 노르웨이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정치와 분리된 전문 기구에 맡겨 투명성 평가 만점을 받으며 2024년 한 해에만 우리 돈 300조원 넘는 수익을 냈고(단, 자국 기업 투자는 금지한 해외 분산 펀드다), 자국 전략산업 투자로는 싱가포르 테마섹이 반세기 가까이 수익을 검증했다.
반면 중국 빅펀드는 부패 수사를, 말레이시아 1MDB는 국가적 스캔들을 겪었다. 같은 도구가 설계에 따라 도약대도, 비리의 온상도 된다. 관건은 손을 떼느냐가 아니라, 정치의 입김을 막고 과실이 국민에게 돌아오게 설계하느냐다. 모두가 베팅에 나선 시대에 홀로 비켜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도박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투자할 것인가. 세 갈래다.
삼성전자가 지난 3월16일부터 19일까지(현지시간)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엔비디아 GTC에 참가해 차세대 HBM4E 기술력과 Vera Rubin 플랫폼을 구현하는 메모리 토털 솔루션을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앞세워 글로벌 AI리더십을 한층 강화한다. 사진은 삼성전자 GTC 부스. (삼성전자 제공, 뉴시스 사진)
AX ― 인프라, 반도체, 피지컬 AI
첫째, AI 투자다. 60년대 경부고속도로, 90년대 정보고속도로처럼 지금은 'AI 고속도로'를 깔 때다. 국가 AI컴퓨팅센터와 GPU, 소버린 AI, 지역 데이터센터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자. 그리고 그 길이 삼성·SK만 달리는 길이 되어선 안 된다. AI 반도체, 소부장, 창업 생태계 등 두 대기업 바깥에 투자해 쏠림 자체를 분산하자.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30년 전 연구가 오늘의 HBM이 됐듯, 'HBM 이후'를 준비하는 투자를 기업이 못 하면 국가가 해야 한다. 끝으로 피지컬 AI다. 제조업·서비스업·지역·중소기업으로 AI가 확산되는 생태계를 만들고, AI의 원료인 데이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데이터 뉴딜'을 추진하자. 데이터 수익으로 '데이터 기금'을 조성해 국민에게 환류시킬 바탕도 된다.
GX ― '에너지 클러스터'
둘째, 에너지 투자다. AI 시대에는 전력이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두 배로 늘어 일본 전체 전력 소비량과 맞먹을 것으로 전망한다. 에너지를 산업 전략과 함께 설계하지 않으면 AI 투자는 모래 위의 집이다.
방향은 '무탄소 기술에너지, 지산지소(地産地消), 소득 공유'. 방법은 전국 100여 군데의 1기가와트급 '에너지 클러스터'를 단계적·장기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역에서 만든 에너지가 지역의 데이터센터와 산업을 돌리고, 그 이익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가게 하자. 풍력 지분을 주민이 갖게 한 덴마크처럼, 전환의 이익을 지역이 가져간 나라들이 전환도 빨랐다. 에너지 전략투자가 곧 지역균형성장 전략이다.
류제명(왼쪽 세번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이 지난달 9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피지컬 AI 선도기술개발 사업 착수보고회에서 김영준 LG전자 연구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과 함께 피지컬 AI 로봇 LG전자 클로이드와 로보티즈 AI워커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HX ― '전 국민 기술교육 인프라', '고급연구자 네트워크'
셋째, 가장 중요한 사람 투자다. AI와 에너지 투자는 이미 시작됐지만, 사람에 대한 전략투자는 아직 부족하다. 기술 경쟁의 승부는 결국 사람이 가른다. 기술의 반감기는 갈수록 짧아져, 대전환의 최종 병목은 반도체도 전력도 아닌 사람이다. 노벨상 수상자 헤크먼은 사람에 대한 조기 투자가 연 13%의 수익률을 낸다는 것을 실증했다. 사람 투자는 복지가 아니라 수익률이 검증된 성장 투자다. 세계경제포럼은 5년 안에 노동자 핵심 역량의 39%가 낡은 것이 된다고 전망한다.
그런데 한국은 역설적이다. 민간과 정부를 합친 R&D 투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2위인데, 성인 재교육 참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고 박사후연구원은 계약직을 전전한다. 기술에 쓰는 돈은 세계 최고, 사람에 쓰는 돈은 바닥.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HX다.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전 국민 기술교육 인프라'다. 취업률 77.9%로 검증된 폴리텍을 전국 시군 단위로 확대하고 소멸 위기의 지방 사립대와 연계해, 누구나 집 가까운 곳에서 1~3년 과정으로 새 기술을 배우게 하자. 싱가포르는 '스킬스퓨처'로 해마다 노동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을 훈련시키고, 스웨덴은 전환기금으로 실직자의 85%를 1년 안에 재취업시킨다. 해고가 추락이 되는 사회와 재기의 출발이 되는 사회의 차이다.
다른 하나는 '고급 연구자 네트워크'다. 지금 젊은 인재들은 연구실 대신 병원과 로스쿨로 향한다. 프랑스 CNRS는 1만6000명 연구자에게 정년 보장 신분을, 독일 막스플랑크·프라운호퍼는 대학 밖에서 5만 명의 안정 고용을 제공한다. 우리도 대학·기업·지자체를 잇는 연구소 네트워크로, '피부과 의사보다 매력적인' 연구자의 삶을 만들자. 과학기술만이 아니다. 기계에 대한 연구만큼, 사람에 대한 연구가 국력이다. 매년 GDP의 일정 비율 이상을 R&D에 투자하도록 법으로 명문화해 어떤 정권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자.
김종민 무소속 의원이 지난 25일 세종시 교육청 교육문화원에서 열린 개원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종민 의원 페이스북 화면 캡처)
위험을 함께 졌다면, 열매도 함께
국가가 위험을 함께 졌다면, 열매도 국민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국가의 투자는 한 번 주면 끝인 보조금이 아니라 지분과 권리로 설계돼야 한다. 미국조차 보조금 준 기업의 주주가 되어 과실을 챙기는 시대다. 국민성장펀드 150조원이 열매를 맺었을 때 그 과실이 어디로 흐를지 지금부터 설계하자. 버는 구조와 나누는 구조를 처음부터 하나로 설계하는 것, 그것이 과거의 산업정책과 다른 점이다.
한 산업, 두 기업에 나라의 미래를 통째로 맡기는 것은 승자독식의 블랙홀에 우리를 던져 넣는 일이다. 국가전략투자란 그 블랙홀에 빨려 들지 않도록 AI·에너지·사람이라는 세 갈래 간선도로를 함께 내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계속 벌 수 있는가. 기업에만 맡겨두면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세 갈래에 현명하게 함께 투자하고 그 과실을 모두가 나눈다면, 우리는 계속 벌 수 있고 그 번 돈이 비로소 '우리 몫'이 된다.
다음 글에서는 더 무거운 질문으로 들어간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일'이란 무엇이 되는가. 일자리가 사라지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대전환 뉴딜 연재 순서
1. 기업의 성공은 국민의 성공으로 이어지는가
- 왜 대전환 뉴딜인가, 승자독식 블랙홀, 3겹의 대전환, 초격차 민생, 정치의 일
2. 대전환 뉴딜, 어떻게 할 것인가
- 미래전략, 연결과 순환, 3대 미래투자, 새로운 돈, 새로운 국가
3. 대한민국은 계속 벌 수 있는가
- 전략투자, AX, GX, HX
4. 일자리가 사라지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 일자리 대전환, 지능산업 일자리, 숙련의 시간, 활동소득
5. 근로소득이 흔들리면, 무엇으로 사는가
- 국민자산제, 자산소득 대중화, 농지개혁과 자산개혁
6. 세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 미래투자기금, 세금이 아닌 출자, 새로운 사회계약
7. 국가의 일, 시민의 일
- 전략국가, 스마트 국가, 스마트 민주주의
김종민 무소속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