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신동문구완구시장의 문구점에서 학생들이 학용품을 고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말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감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적절한 언어를 만나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문장을 읽다가 비로소 '내가 느낀 게 이거였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언어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감정을 발견하게 만드는 도구에 가깝다.
최근 한 책에서 '우울은 되고 싶은 나와 되어 있는 나 사이의 격차 때문에 생겨난다'는 문장을 읽었다. 다만 이 설명에는 하나의 전제가 빠져 있다. 그 간극의 출발점인 '되고 싶은 나'가 과연 자신의 욕망인가 하는 점이다. 사람은 홀로 사고하는 시간보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시간이 훨씬 길다. 성장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칭찬과 비교, 기대와 충고는 하나의 기준을 형성하고, 그 기준은 점차 개인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타인의 시선은 어느 순간 자신의 욕망으로 번역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목표는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이러한 착각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생각처럼 보이던 것들이 문장으로 옮겨지는 순간 서로 다른 목소리로 분리된다. 무엇은 자신의 판단이고, 무엇은 타인의 기대였는지가 그제야 드러난다. 생각은 머릿속에 있을 때보다 글이 되었을 때 더 선명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생각의 출처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사회는 오래 버티는 사람에게 성실하다는 이름을 부여한다. 반대로 중도에 방향을 바꾸는 사람에게는 쉽게 포기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목표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의 대상이 된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일을 계속 붙드는 이유 역시 간절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만두는 순간 따라붙을 실패라는 낙인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사람은 목표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목표를 잃은 사람으로 규정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재판관이 된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현재의 모습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이상과의 거리를 이유로 스스로에게 형벌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 심판 역시 자신의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준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는 순간 삶은 끝없는 재판이 되고, 개인은 스스로 만든 단두대 위에 선다. 필요한 것은 더 높은 목표가 아니라 목표의 출처를 확인하는 일이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보다 먼저, 그 욕망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태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과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향한 심판도 멈출 수 있다.
이혜지 기자 ziz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