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정부가 농촌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농촌관광벨트’ 시범모델을 발표했습니다. 전국 139개 시·군을 검토해 11개 권역의 체류형 코스를 설계하고 대중교통 할인 혜택을 더한 ‘농촌투어패스’를 88개 시·군으로 확대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이를 통해 현행 43.8% 수준인 농촌관광 경험률을 5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포부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어를 걷어내면 현장의 고질적인 한계를 외면한 행정 편의주의와 성과주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행정구역의 경계를 허문 광역 연계 모델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수요 창출을 자신하고 있지만 정작 알맹이가 빠진 ‘보여주기식 행정’에 그친다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지역 거점으로 삼은 기존 유명 관광지들마저 관광객 감소와 정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정교한 인프라 보완 없이 ‘선 긋기’와 ‘할인권 배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전한영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정책국장이 지난 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농촌관광벨트 시범모델 개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특히 이번 농촌관광벨트 공식 발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농촌의 가장 치명적인 현실인 ‘소멸 위기’라는 단어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농촌 소멸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농민 기본소득, 치킨벨트, K-미식벨트 등 다각도의 대안을 내놓았던 농식품부의 기존 기조와는 사뭇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시·군 경계를 넘어 관광자원을 연결하고 빅데이터로 방문객 흐름을 분석했다는 거창한 설명이 무색하게 이 대책이 과연 농촌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방안인지, 아니면 그저그런 ‘관광 안내서’에 불과한지 의문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정책으로 새로운 관광지가 생기거나 획기적인 교통·숙박 대책이 마련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험마을, 양조장, 미식벨트, 치유농장, 휴양림 등 이미 존재하는 자원들을 다시 묶어낸 기존 정책의 반복일 뿐, 새로워진 것은 ‘벨트’라는 이름뿐입니다.
단순히 관광코스로 홍보하기엔 농촌이 직면한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사람이 오지 않는 이유는 볼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가기 어렵고 머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던 주민들조차 떠나는 마당에 정책의 본질적 명제였던 ‘소멸 극복’은 사라지고 힐링, 미식, 투어패스 같은 세련된 마케팅 용어들만 즐비하니 결국 반쪽짜리 홍보물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0일 K-미식벨트에 이어 ‘균형성장과 에너지 전환을 선도하는 농산어촌(국정과제 70)’의 일환으로 ‘농촌관광벨트 시범모델’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자료=농림축산식품부)
농촌투어패스 대상을 ‘인구감소지역 88개 시·군’으로 확대하겠다는 대목 역시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인구감소지역의 총개수를 기계적으로 가져와 얹은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진짜 소멸 위험이 높은 농촌 마을을 정밀하게 타기팅하는 묘수는 없고 타 부처의 행정 지도 위에 농촌 관광이라는 숟가락만 얹은 셈입니다.
또 88개 시·군 전체로 혜택을 넓힌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정작 11개 시범모델의 거점은 충남 예산시장과 아산 외암민속마을, 당진 삽교호 등 이미 주말마다 주차 대란을 겪는 이른바 ‘지역 핫플레이스’들이 대거 포함돼 있습니다. 인프라가 갖춰진 유명 거점을 제외하면 교통도 숙박도 없는 오지 농촌에는 그저 또 다른 희망고문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기존 유명 관광지를 거점으로 삼았다는 입장이지만 ‘균형 발전’과 ‘취약 지역 우선 지원’은 공공 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이번 대책은 병세가 위중한 응급 환자는 방치한 채, 비교적 건강한 환자에게 영양제를 주사하고 의료 성과가 좋다고 자화찬하는 격과 다름없습니다.
또 농촌 관광객 90%가 자가용을 이용하는 현실에서 기차역과 터미널까지만 유효한 반쪽짜리 교통 할인은 ‘뚜벅이’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무런 유인책이 되지 못합니다. 내부 연계 모빌리티와 야간 문화 콘텐츠에 대한 실질적인 투자 없이 관 주도로 선만 그어놓은 관광 코스는 결국 낮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당일치기’ 관광만 심화시킬 뿐입니다. 무더위 속에 이 긴 코스를 하루 만에 다 도는 것이 과연 지속 가능하겠습니까.
2026년6월1일 서울에 위치한 서울역에 시민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진=뉴시스)
할인권 배포 같은 단기 처방도 재정 지원이 끊기면 단숨에 동력을 잃고 맙니다. 게다가 지자체에 ‘가이드라인’ 안내서 한 장 쥐여주며 알아서 협력하라는 방식은 무책임한 행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지자체들 사이에서는 거점 지역에만 체류와 소비가 쏠리고 나머진 지나가는 단순 경유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내놓기 충분합니다.
농촌에 사람이 오지 않는 진짜 이유는 관광코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고 기차역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할 방법이 없으며 머물 만한 숙소와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창업할 환경도,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소득을 얻을 구조도 갖춰지지 않은 채 생활 인프라가 무너진 지역에 관광 코스만 덧씌운다고 해서 체류형 관광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농촌 정책은 이름만 바꿔가며 수없이 등장했습니다. 농촌뉴딜, 농촌협약, 생활인구, K-미식벨트, 치킨벨트, 농촌투어패스까지 새로운 브랜드는 끊임없이 양산됐습니다. 그러나 정작 농촌 인구는 줄었고 빈집은 늘었으며 고령화는 더욱 심화됐습니다. 화려했던 정책 이름 뒤로 농촌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를 직시해야 합니다.
정책은 늘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관광벨트만 그리는 데 집중하기 보단 사람들이 실제 머물 수 있는 조건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숙박 인프라를 확충하고 광역 대중교통을 연결하며 빈집을 활용한 체류시설을 조성하고 청년 창업과 지역 상권을 함께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관광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결과물이지 출발점이 될 수 없습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024년3월2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농촌소멸 대응 추진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