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꽤나 밟았지만 그린 위에서 라이를 읽어내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어차피 캐디가 거리를 계산해 공을 놔주는 친절함에 길들여진 탓이다. 큰맘 먹고 장만한 부쉬넬 거리측정기도 파우치 안에 잠들어 있기 일쑤다. 매번 꺼내보는 일조차 번거로워 결국 “얼마나 쳐야 해요?”라며 캐디 입만 바라보게 된다. 치솟는 캐디피 부담에 노캐디 구장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지만, 퍼팅 라인을 맨눈으로 읽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인이 명쾌한 답을 냈다. “조금만 기다려봐. 조만간 AI 안경이 거리랑 라이, 바람까지 다 읽어줄 테니까.”
스마트 안경이 퍼팅 라인과 거리, 경사 정보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모습. (사진=챗GPT)
실제 퍼팅 그린을 정밀하게 읽어내는 스마트 안경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메타의 AI 안경은 음성 명령으로 코스 정보를 확인하거나 1인칭 스윙 영상을 촬영해 준다. 최근 속속 등장하는 고성능 증강현실(AR) 안경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렌즈 위로 퍼팅 그린의 굴곡과 공이 굴러갈 궤적을 붉은 선으로 직접 띄워주기까지 한다. 300만 원대에 달할 만큼 아직은 고가지만, 캐디의 경험에 기대던 숏게임이 정밀한 데이터 영역으로 넘어갈 채비를 마친 셈이다. 영화 ‘킹스맨’ 속 요원들이 안경으로 정보를 스캔하고, ‘아이언맨’이 렌즈 위에 복잡한 수치를 띄워 작전을 지휘하던 장면은 더 이상 영화 속 상상이 아니다.
기술의 진보 뒤에는 늘 짙은 그림자가 따른다. 메타의 최신 AI 안경이 ‘변태 안경’이라는 오명을 쓴 것이 단적인 예다. 누군가는 평범한 뿔테 속에 숨겨진 초소형 카메라로 타인의 사생활을 은밀하게 훔쳐봤다. 이 빗나간 쓰임새는 급기야 시험장까지 뻗쳤다. 지난 5월 국내 토익 시험장에서 스마트 안경을 이용한 부정행위가 처음으로 적발되면서, 다가오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교육 당국과 각종 시험 주관사들에 비상이 걸렸다. 당장 이달 치러지는 7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스마트 안경이 아예 금지 물품으로 지정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적발 시 시험 무효는 물론 추후 3회 응시 제한이라는 강수를 뒀다.
결국 모든 데이터를 띄워주는 이 똑똑한 안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거리와 경사, 바람의 방향까지 기계가 떠먹여 준다면 골프의 진짜 재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안경테가 반짝일 때마다 날 찍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면 우리는 타인과 제대로 눈을 맞출 수 있을까. 정답까지 눈앞에 띄워줄 수 있는 기기가 존재한다면 시험은 과연 실력을 겨루는 무대가 될 수 있을까. 혁신을 품은 렌즈는 세상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더 좁아질지도 모른다. 기술은 언제나 최적의 길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지는 일만큼은 여전히 안경 뒤에 선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