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한국에서 기자간담회를 열 때마다 가장 많이 강조했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스토리'입니다.
2023년 6월 한국을 찾은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숏폼 열풍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숏폼을 통해 순간적인 즐거움과 설렘을 느낄 수 있지만, 넷플릭스는 좀 더 프로페셔널한 스토리텔링을 원한다"며 "내용이 길더라도 좋은 이야기라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한국 콘텐츠에 대해서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한국은 스토리텔링의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스토리텔링은 역사를 반영하고 있고, 흥미로운 점은 패션과 음악, 음식, 스토리텔링이 모두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고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한국 콘텐츠의 힘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넷플릭스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결국 경쟁력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유튜브나 틱톡처럼 짧은 영상 플랫폼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메시지로도 읽혔습니다.
그런데 불과 3년이 흐른 지금, 넷플릭스도 새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먼저 선보인 세로형 클립 영상을 한국에도 출시하기로 했습니다. 모바일에서 짧은 영상을 넘겨보다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바로 본편으로 이어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넷플릭스는 콘텐츠 탐색 시간이 짧아진 모바일 이용 환경에 맞춘 변화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넷플릭스가 스토리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긴 호흡의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핵심 경쟁력입니다. 달라진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발견하게 할 것인가'입니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긴 콘텐츠를 보기 전에 먼저 짧은 영상으로 작품을 만납니다. 유튜브 쇼츠, 릴스, 틱톡에서 한 장면을 보고 관심이 생기면 본편을 찾아보는 소비 패턴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넷플릭스 역시 이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시장은 늘 소비자가 이끌어 갑니다.
스토리의 힘은 여전히 넷플릭스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발견되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넷플릭스도 시장의 변화에 맞춰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를 넘어, '좋은 콘텐츠를 가장 먼저 발견하게 만드는 시대'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