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오늘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정청래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 18일 의원총회장에 들어서면서 "다 흔들리면서 젖으면서 가는 게 인생 아니겠나"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당 국회의원이었던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인용한 겁니다.
정 전 대표가 이 시를 인용한 시기가 참 공교로웠습니다. 지방선거 이후 이재명 대통령과 대결 구도를 그리다 귀국길 영접에 나서 90도 인사를 한 직후였습니다. 전당대회 출마를 앞두고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다 고개를 숙인 자신의 심경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를 통한 정 전 대표의 감정 표현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 전 대표는 지난 20일 전남 해남군 미황사를 방문해 "힘들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생각한다"며 이 시를 낭독했습니다.
정 전 대표가 두 번이나 인용한 시는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고 젖는 시간을 보냈으니 이 시를 읽는 당신도 힘을 잃지 마시라'라는 한 문장으로 귀결됩니다.
정청래 전 민주당 대표가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표직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큰 지장을 주진 않겠으나 흔들린다는 건 피동성을 전제로 합니다. 꽃을 피워내기까지 거치는 험난한 과정이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을 견뎌내며 피는 꽃 정도가 제목으로 어울렸겠죠.
정 전 대표는 아무래도 자신 역시 꽃을 흔들고 적시는 환경에 놓였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특히 전당대회를 앞두고 치른 지방선거에서 기대보다 못한 결과를 떠안게 되자 연임을 저지하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흔들리고 젖는다고 느꼈으리라 짐작됩니다.
대표직에서 물러난다면서 "당 안팎의 저항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말없이 묵묵히 일했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일 테죠. "오늘 당대표직을 내려놓지만 저는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제가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그 길이 비록 험난한 고난의 가시밭길일지라도 오직 민심, 오직 당심만 보고 저의 길을 갈 것"이라고 한 말도 동일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의도와 행동이 그릇되지만 않는다면 정치인의 자기 정치를 욕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직 연임 도전을 공식화하진 않았지만, 정 전 대표는 본인이 한 번 더 당대표로서 당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나름의 당위성을 갖췄겠죠. 자신을 흔들리며 피는 꽃에 비유한 건 이 당위성에 서사를 더하는 일종의 장치일지도 모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비에 젖는 시간을 지나 개화하는 꽃이 용퇴론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연임에 성공한다는 구상과 맞아떨어진다는 판단도 이 시를 인용한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청와대와의 불협화음으로 사퇴 압박을 받는 외부 환경, 그럼에도 결실을 맺는다는 이미지 모두 시와 일치합니다. 물론 다른 지점도 있습니다. 꽃은 의지와 무관하게 흔들리거나 젖을 수 있는 반면 정치인은 그런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죠.
그런 점에서 의문이 듭니다. 정 전 대표는 정말 흔들린 것인지. 아니면 본인 스스로를 쥐고 흔든 것인지.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