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미국과 이란 간의 종전 양해각서(MOU) 체결로 시장은 오랜 가뭄 끝 단비처럼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입니다. 올해 3월 미·이란 충돌로 촉발된 중동 지정학적 충격은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을 가중시키며 우리 경제의 공급망을 사정없이 뒤흔들었으니 오죽할까요.
불확실성의 정점에서 미국은 이란 전쟁에만 61조원 상당을 쏟아 부었고 우리 선사들은 한 척 한 척 중동 해협을 빠져나올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최근 종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대외적 리스크는 다행히 완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동 지정학적 위기 해소로 경제가 곧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실물 경제가 체감하는 비용 부담의 전이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최근 한국은행의 ‘2026년 상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을 보면, 비용 측면의 가격 인상 압력이 전이되면서 하반기에도 소비자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6월21일 소비자가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계란 판매가격을 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비용 상승형 복합 충격
데이터로도 고스란히 확인됩니다. 5월 생산자물가지수(잠정) 총지수(2020=100)는 전월 대비 0.8%, 전년 동월 대비 8.5% 급등한 129.82를 기록했습니다. 도매물가 격인 생산자물가의 폭등은 조만간 밥상 물가를 덮칠 하반기 소비자물가 폭탄의 도화선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가 불안의 기저에는 단순히 ‘원자재 부족’ 사태를 넘어선 비용 상승형 복합 충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동 충격 직후 원유와 나프타 등 핵심 원자재의 수입 단가는 35~43%가량 폭등한 반면, 수입 중량은 최대 30% 가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돈은 더 많이 지불하면서도 들여오는 절대량이 줄어드는 전형적인 공급 충격의 형태가 뚜렷해진 것입니다.
더 뼈아픈 대목은 ‘공급망 다변화’ 전략이 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공급 충격이 가해지자 기업들은 신규 공급선을 개척하기보다 기존의 익숙한 경로에 매달리는 ‘재집중’ 현상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수천 개 품목의 최대 공급국 의존도가 상승했습니다. 뒤늦게 걸프권 중심의 조달처를 미국, 호주 등으로 긴급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물류비와 조달 수수료는 고스란히 국내 산업계의 구조적 비용 상승으로 고착화됐습니다. 실질적인 대체조달 전환 복원력이 결여된 다변화는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입니다.
6월22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 환전소에 원·달러 환율 등 통화별 환율이 표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국채·테크 경고음
대외 리스크 완화라는 시장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는 뇌관은 또 있습니다. 국채 가격 급락(국채 금리 급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3월 전쟁 발발 이후 불과 두 달 만에 일본(31.6%), 한국(23.2%), 영국(18.3%), 미국(13.5%) 등 주요국의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일제히 급등했습니다. 이는 인플레이션 고착화 우려로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기초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시장 금리의 상방 압력은 고스란히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 부담으로 귀결됩니다. 특히 그동안 자본시장을 견인해 온 ‘인공지능(AI) 투자 붐’의 이면은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데이터 센터 증설 경쟁에 뛰어든 테크 기업들은 전통 은행이 아닌 사모 신용 펀드로부터 무분별하게 자금을 조달하면서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게 시장의 냉정한 평가입니다.
고위험 대출에 대한 부실 징후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익 창출이 지연되자 사모펀드들이 투자자에게 현금 대신 주식(현물)으로 배당을 때우는 고육책을 쓸 만큼 신용 위험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올해 5월 중순 기준 S&P500 총지수가 연초 대비 8% 상승하는 동안 금융 섹터 지수는 7% 이상 하락하며 92.96으로 주저앉았습니다. 이 통계는 자본시장 내부의 신용 공포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대변합니다.
자본시장의 투기적 광풍과 실물 경제의 초양극화가 어느새 궤를 함께하는 형상도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국내 증시는 빚을 내 투자하는 신용융자 잔고가 무려 36조원을 돌파한 상태입니다. 글로벌 펀드들은 이러한 과열된 투기적 광풍을 간파하고 한국 시장을 빠르게 탈출하며 경고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6월22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시황이 표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투기적 광풍, 초양극화 그늘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기형적인 자본시장의 불꽃놀이 이면에서 민생 경제의 허리가 완전히 꺾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으면 소득 활동을 하는 인구의 절반 이상은 가처분 소득이 마이너스로 돌아섭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반도체 호황이라는 착시효과 뒤에 내수 제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이 고사하는 극단적 양극화 체제에 갇혀 있습니다. 비반도체 부문 임시·일용직 노동자의 소득이 반도체 대기업 상용직 수입의 7%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소득 분배 구조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금융 안전망 확충이나 유통 마진 통제 같은 사후약방문식 대책으로는 다가오는 물가 해일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급망 정책의 패러다임을 ‘단순 공급국 수 늘리기’에서 ‘실질적 공정 투입이 가능한 대체조달 능력 강화’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산업의 숨통을 틔울 수 있습니다.
나아가 기술 호황으로 얻은 가치사슬의 과실을 투기 자본의 잔치로 방치하기보단 내수를 강화하고 가계의 노동 소득 기반을 복원하는 재원으로 과감히 환류시킬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절실합니다.
2기 내각은 ‘대체불가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단순한 육성 구호가 아닌 공급망 복원력, 에너지 안보, 내수 경쟁력, 노동소득 회복이라는 네 개의 축으로 구체화해야 합니다. 외부 충격이 반복되는 시대에 국가 경쟁력은 더 많이 수입하고 더 많이 투자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생산과 소비, 고용이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구조를 만드는 데서 시작됩니다.
대한민국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싸게 조달하는 경제’가 아니라 ‘끊겨도 버티는 경제’, ‘소수 산업의 독주’가 아니라 ‘국민 다수가 체감하는 성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중동 위기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기술과 산업, 금융과 민생이 함께 안전하게 작동하는 체질 개선에 성공할 때, 비로소 ‘대체불가 대한민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월12일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인근 도로에 직장인들이 대형 모니터로 중계되는 축구 경기에 환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