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어렸을 적 프로레슬링을 즐겨봤습니다. 사전에 마련된 대본과 치밀하게 짜여진 동선으로 탄생한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화려함에 매료됐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요즘에도 TV 채널을 돌리다 프로레슬링을 중계하면 잠시라도 눈길을 내어줍니다.
프로레슬링의 매력 중 하나는 현실에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낸다는 점입니다. 사소한 한 걸음조차도 철저하게 계산된 동작이 쾌감을 선사할 수 있는 건 현실에서 비현실성을 만들어낸 덕분일 겁니다.
이런 비현실을 선거 과정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6·3 지방선거 당시 부산시장 도전장을 내밀었던 정이한 전 개혁신당 후보 이야기입니다.
정 전 후보는 출마 선언 이후 두 차례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유세 중 폭행을 당한 게 처음이었고, 방송사 주관 TV 토론에 초청받지 못해 단식을 이어가다 이송된 게 두 번째였습니다.
정 전 후보가 처음 병원으로 실려간 이유였던 폭행은 테러 수준이었습니다. 정 전 후보는 지난 4월27일 부산 금정구 구서나들목 인근에서 유세 도중 차량 운전자가 창문 밖으로 뿌린 음료수를 피하다 넘어져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차량 운전자가 뿌린 음료가 단순히 물이나 음료수가 아니었다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의식을 차린 정 전 후보는 봉변을 당한 지 사흘 뒤인 4월30일 부산 금정경찰서를 찾아 차량 운전자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정 전 후보는 당시 진심으로 반성하는 가해자에게 순간의 실수가 평생의 족쇄가 되도록 두는 것은 제가 바라는 정치의 방향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왼쪽)와 정이한 전 부산시장 후보가 4월29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에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시간은 흘러 지방선거는 끝났고 정 전 후보는 1.56%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경찰은 음료 투척과 이에 따른 부상이 정 전 후보의 자작극일 수 있다면서 사실관계 파악에 나섰습니다. 수사 결과에 따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허위사실 공표 등의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개혁신당은 정 전 후보가 온라인 시스템을 통해 탈당한 상태라고 알렸습니다. 자작극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되자 당을 떠난 것인지, 이와 무관하게 정계 은퇴를 위해 탈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음료 투척 테러와 병원 이송이 자작극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정 전 후보는 프로레슬링 연출가와 대본가, 선수 몫을 한꺼번에 한 셈이네요. 간혹 철제 의자 같은 위험한 물건으로 공격을 받은 뒤 실려가는 프로레슬링 선수들도 있는데, 정 전 후보는 그런 장면을 선거판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폭력적 장면의 유사성을 걷어내면 프로레슬링과 정 전 후보를 향한 공격은 크게 다릅니다.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를 치르면 관객들과 시청자는 열광합니다. 유희를 위한 눈속임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했으니까요. 정 전 후보의 액션이 자작극이 맞다면 유권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속은 겁니다. 부산시민의 대리인이 돼서 시정을 이끌겠다고 출마한 사람이 시민을 우롱한 처사입니다.
프로레슬링 관객은 돈을 내고 자발적 눈속임을 삽니다. 선수는 쾌락을 제공하죠. 정 전 후보는 자작극으로 표를 얻고 무엇을 내어주려 했습니까?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