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정답을 가장 잘 맞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을 주는 사회였다. 수능이라는 획일화된 시험으로 청년들을 줄 세우고, 최상위권은 질 좋은 일자리를 전리품으로 챙길 수 있었다. 극단적인 ‘의대 쏠림’ 현상 역시 맹목적인 점수 경쟁이 낳은 씁쓸한 결과물이다. 최고 수준의 두뇌들이 수년간 삼수와 사수를 거듭하면서 입시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사회가 보장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성공의 사다리가 의대였던 까닭이다.
'의대 성벽'을 넘어 첨단산업으로 향하는 청년들. AI는 대한민국 인재들이 향하는 방향과 성공의 공식을 바꾸고 있다. (이미지=ChatGPT)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이 익숙한 질서를 흔들고 있다.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이 국가 경제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면서 우수 인재들이 활약할 무대가 넓어졌다. 보상 규모도 역대급이다. 전문직 못지않은 파격적인 대우와 성장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주요 대학에 개설된 SK하이닉스 계약학과는 전액 장학금과 졸업 후 100% 고용 보장이라는 혜택까지 내걸었다. 의대 6년을 졸업한 뒤에도 인턴과 레지던트, 전임의(펠로우) 과정까지 십수 년을 꼬박 병원에서 밤낮없이 버텨야 비로소 전문의나 봉직의(페이닥터)로 안착하는 고단한 수련 과정 대신, 일찍 사회에 진출해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학원가에 ‘하의치한약수’(하이닉스·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이유다.
첨단 기술의 진화는 획일적인 스펙 경쟁에 갇혀 있던 기업 채용의 오랜 문법마저 허물고 있다. AI가 인간의 단순 암기력과 정보 검색 능력을 압도하면서, 수많은 자격증이나 어학 점수보다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실무 역량이 핵심 평가 기준으로 떠올랐다. SK하이닉스가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학력 제한을 전면 폐지한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대학 간판’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깨고 지원자의 실질적인 사고력을 평가하겠다는 선언은 인재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사회는 수십 년간 수능 등 입시 제도를 수없이 뜯어고치며 맹목적인 점수 경쟁과 쏠림 현상을 막아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어쩌면 AI가 안겨준 가장 큰 혁신은 기술 발전 자체가 아니라, 낡고 획일적인 한국사회의 성공 공식을 허물어뜨린 데 있다. 정해진 답을 기계처럼 외워 안락한 성벽 안에 머무는 시대는 끝났다. 다가올 미래의 주도권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낯선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자들의 몫이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