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을 직접 만들지 않는 엔비디아가 한국의 제조업 총수들을 잇달아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인공지능(AI) 다음 격전지로 꼽히는 '피지컬 AI(로봇·자동차 등에 탑재된 AI)'에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반을 갖춘 한국을 미래 AI 산업의 테스트베드로 삼기 위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4박 5일간의 방한을 마치고 9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출국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9일 업계에 따르면 젠슨 황 CEO는 지난 5일 방한 이후 4박5일의 짧은 일정 동안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삼성전자, SK그룹, LG그룹, 네이버 등 주요 대기업 경영진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지난해 10월 이후 약 7개월 만의 방한이다.
과거라면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엔비디아의 방한이 이처럼 재계의 큰 관심을 끌지는 않았을 수 있다. 엔비디아는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설계만을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기업으로 제조 공장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AI 산업의 무게중심이 데이터센터를 넘어 로봇과 자율주행차, 스마트팩토리 등 물리적 세계(Physical AI)로 확장되면서 엔비디아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답하는 단계였다면, 피지컬 AI는 AI가 실제 세상에서 움직이고 판단하는 단계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물건을 옮기고, 자동차가 스스로 주행하며, 공장이 AI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AI 시대 다음 격전지가 바로 피지컬AI인 것이다.
피지컬 AI 현실화를 위해서는 AI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뿐 아니라 실제 산업 현장에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검증할 제조 생태계가 필요하다.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들에 주목하는 이유다.
황 CEO는 방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한국은 AI와 로봇공학 전문성이 뛰어나고 세계적인 제조 허브"라고 말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자동차, 가전, 배터리 등 거의 모든 제조 산업이 집약된 한국이 피지컬 AI를 시험하고 상용화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의미다.
특히 현대차그룹과의 협력은 피지컬 AI 전략의 핵심 축으로 평가된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로봇 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제조 공정에도 AI를 적극 도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방위적으로 엔비디아와 협력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전날 현대차그룹 양재동 사옥에서 황 CEO를 만나 새만금에 조성중인 'AI밸리'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
SK그룹과는 AI 인프라 협력이 중심이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는 AI 팩토리 구축을 위한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고 있으며 AI 인프라와 퍼스널 AI, 피지컬 AI 등 차세대 시장 확대를 위한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LG그룹 역시 엔비디아와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LG전자는 휴머노이드와 물류 로봇 등 차세대 로봇 분야에서 데이터 구축부터 시뮬레이션, 학습, 행동 구현까지 전 과정에 걸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더 이상 AI 반도체 회사에 머무르지 않고, AI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AI의 최종 목적지가 현실 세계라면 그 무대는 결국 제조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제조 역량을 갖춘 한국 기업들이 엔비디아가 그리는 피지컬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