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고민이 뭐예요’라고 물으신다면 ‘수급’입니다. 사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합니다. ‘오늘 양파값 얼마지’, ‘오늘 계란 값은 얼마인 거야’ 이 생각이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푸릇함이 짙어가던 전북 순창의 한 영농 현장. 지난주 기자들과 마주 앉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소박하고도 적나라한 고백은 대한민국 농정의 수장이 짊어진 무게를 고스란히 대변합니다. 새 정부 출범 1년을 맞았지만 사실상 유임 장관으로서 누구보다 긴 현장을 누벼온 그의 소회가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인구 소멸의 대안으로 떠오른 ‘농어촌 기본소득’의 첫 성과를 목도하는 자리임에도 장관의 머릿속 고민이 ‘수급’인 이유는 물가 방정식이 더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일 서울 한 마트에서 소비자가 계란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물가 지표뿐만 아닌 다가올 여름철 기상 이변이 농업인에게는 생존을, 소비자에게는 일상의 평화가 달린 문제죠. 농식품부는 물가를 직접 통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생산과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수급 기관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최근 물가 성적표는 농식품부를 끊임없이 주눅 들게 만듭니다.
전 세계적인 공급망 불안과 중동 전쟁의 전운이 가중되면서 기름값·원자재 가격이 요동쳤고 소비자물가는 2년2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인 3%대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는 2.5% 수준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제되고 있다지만 국민들이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생활물가지수 앞에서는 무력한 수치일 뿐입니다.
마트에 들어선 소비자들이 지갑 열기를 주저하며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통계학적 가중치로 묶인 거시 지표가 어떻든 간에, 당장 식탁 위에 매일 올라가야 하는 농축산식품가격이 널뛰기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농축산식품과 수산물까지 가격 변동성이 더 자주, 훨씬 거칠게 우리 일상을 흔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기후 변화는 이따금 찾아오는 가뭄이나 폭우 같은 이변이 아닙니다.
매해 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기상청이 예고하는 여름철 폭염과 엘니뇨로 인한 집중호우는 노지에서 자라는 채소들의 재배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할 것입니다.
지난 5월25일 서울 시내 대형 마트에 판매하는 양파를 진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농산물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흔히 복잡한 유통 구조와 중간 상인의 폭리를 주범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수급의 열쇠는 유통의 단계보다 ‘생산의 안정성’에 있습니다. 한 번 기상이변으로 무너진 산지의 공급망을 복구하는 데는 최소 수개월의 시간과 자연의 자비가 필요하지만 소비자의 식탁은 단 하루도 공급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날씨라는 천재지변 앞에서는 정부가 내놓는 미시적인 할인 지원책이나 유통 마진 단속, 임기응변식 비축물량 방출은 결국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단기 처방에 불과합니다. 기후 위기 시대의 수급 안정이 결코 단기적인 유행이나 몇 차례의 대책 발표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농업 분야에 투입하는 예산과 자금을 다소 시혜적인 ‘보조금’이나 낙후된 산업을 구제하기 위한 복지비용 정도로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어려울 때마다 세금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지원한다는 식의 냉소적 여론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일상화된 지금의 농업 투자는 결코 특정 집단을 위한 특혜가 아닙니다. 기상이변에 대응한 스마트팜과 가뭄·폭우에 견디는 첨단 시설 확충, 재해에 강한 신품종을 바이오 기술로 개발하는 일은 5000만 국민 전체의 ‘식량 안보’를 확보하고 가계의 ‘밥상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가장 확실하고 생산적인 국가 필수의 인프라 투자로 여겨야합니다.
지난 5월6일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은 소비자들이 장을 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도체 공장에 용수·전력을 공급하는 인프라 투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듯, 농촌의 기후 적응력을 높이는 인프라 투자는 국민의 생존권을 좌우하는 일입니다. 정부 출범 1년을 지나며 다져진 정책의 씨앗들은 싹을 띄울 것입니다.
시행 초기이지만 지역 활력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농어촌 기본소득’과 역대 최대 실적을 새로 쓴 ‘K-푸드 수출’, 취약계층 중심에서 청년, 노동자까지 지원 범위를 넓힌 ‘먹거리 돌봄 기본보장 강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농산물 가격 변동에 따른 농가의 경영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오는 8월말 시행을 앞둔 농산물가격안정제, 양곡관리법, 재해대책법 등 여러 핵심 정책들도 예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정비가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과감한 예산적 뒷받침은 필수적입니다. 하늘의 변덕 앞에서도 농민은 땀 흘린 대가를 정당하게 보장받고 소비자는 물가 불안과 한숨 없이 따뜻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세상. 그 균형 잡힌 ‘수급의 평화’는 농촌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미래를 준비하는 전략적 투자처로 대우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지난 28일 전북 순창 유등면에 위치한 '순창곳간'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