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중반,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수출 시장을 등에 업고 황금기를 누렸다.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낮은 인건비와 정부 보조금을 앞세운 중국이 석화시설을 빠르게 늘려가더니, 이내 저가 밀어내기로 국내 업계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한때 황금알을 낳던 시장이 무시무시한 경쟁자로 돌아선 것이다.
중국의 증설로 글로벌 수급균형이 깨지자 업계와 정부가 꺼내든 처방전은 구조조정이었다. 공장 일부를 멈추고, 설비를 통합해 공급량을 줄이겠다는 고육지책이다. 수년간 설비와 인력을 쌓아온 업체들에게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수급 균형 회복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업체 간 합의도 하나둘 이뤄졌다.
그런데 울산에서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에쓰오일의 9조 원짜리 샤힌 프로젝트가 올해 말 가동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연간 에틸렌 180만 톤. 업계 전체의 감산 노력을 퇴색시킬 수 있는 물량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질 참이다. 누군가는 스위치를 끄고 있는데, 누군가는 스위치를 켜려 하고 있다.
가동이 한창인 울산 석화단지 공장들.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안타까운 것은 양측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에쓰오일이 샤힌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은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되기 훨씬 전의 일로, 수조 원을 이미 투입한 상황에서 멈추라는 요구는 가혹할 만하다. 동시에 고통을 분담하는 업체들 입장에서는 혼자만 딴 길을 걷는 동료를 곱게 바라볼 수 없다. 불합리와 합리가 아닌 2개의 합리가 충돌하는 상황 속, 합의는 여전히 지연중이다.
이 괴리를 봉합해야 할 정부의 행보는 아쉽기만 하다. 중동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 여념이 없는 사이, 석화업계의 장기적인 체질 개선을 위한 발걸음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기업 자율이라는 말 뒤에 서서, 합의점 마련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정부 역시 어느 한 쪽의 손을 쉽게 들어줄 수 없다는 사정 또한 이해한다. 하지만 업계와 함께 구조조정을 주도한 주체가 정부라면, 지금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이원진 기자 blue45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