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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의 품격
입력 : 2026-05-20 오후 9:00:41
[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단식은 때때로 타인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대신 폭력을 내재화하는 투쟁 방식으로 쓰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단식은 굵직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1979년 YH무역 폐업에 반대하던 여성노동자들의 단식 투쟁이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산업화에만 매몰됐던 한국 사회에 노동자 권리가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는 점을 일깨웠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은 군부독재의 종말과 대통령 직선제를 촉발한 단초이기도 했습니다. 가택연금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이 무려 23일간 곡기를 끊고서야 후진적인 정치 제도가 개선의 여지를 찾은 겁니다.
 
이 밖에도 단식은 한진중공업 일부 해고자 복집 합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사회적 그리고 제도적 변화로 연결되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대개의 단식 투쟁은 나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습니다. 단식을 해야 할 만큼의 명분이 수반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사회에 전달할 메시지가 있을 때 꺼내 쓰던 단식 투쟁이 이제는 개인적 호소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정이한 개혁신당 부산시장 후보가 지난 12일 방송 토론 참여를 요구하며 단식하고 있다. (사진=정이한 후보 캠프)
 
정이한 개혁신당 부산시장 후보는 지난 8일 단식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방송사에서 마련한 부산시장 후보자 초청 토론회에 자신이 배제됐다는 게 농성의 이유였습니다. TV 토론회 참석을 위한 모든 법적 요건을 갖췄다는 주장은 농성의 당위성으로 쓰였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는 토론회와 달리 방송사 토론에선 모든 후보자를 초청할 의무가 없습니다. 각자 조건에 맞는 통상적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춰 토론회를 진행할 뿐입니다.
 
정 후보가 제시한 근거가 부당한 건 아닙니다. 정 후보는 그간의 지방선거에서 3당과 4당 후보들이 방송사 초청 TV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렇다 해도 정 후보의 단식이 충분한 명분을 확보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소수 정당의 청년 정치인이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게 단식을 하는 이유인데, 정 후보의 단식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개인 차원에서 그쳐서는 안 됐습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의 연대가 전제됐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겁니다. 연대 없는 단독 단식 농성은 개인의 토론회 참석을 위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단식은 개인에서 혹은 작은 단체에서 시작돼 사회로 퍼지는 저항입니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오직 자신들의 처우를 위한, 집단 이기주의만을 탑재한 단식을 했다면 노동자의 권리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김 전 대통령이 개인의 정치적 영달을 추구했다면 23일간의 단식은 지금과는 다른 잣대에서 평가받았을 겁니다.
 
정 후보는 단식 일주일 만인 지난 14일 병원으로 이송됐고, 의료진 권고에 따라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을 되찾을 출구를 찾았다는 점이 반갑습니다. 반가움에 바람을 담아 전하건대 앞으로 단식을 고려해야 한다면 보다 큰 뜻이 담겨있길 바랍니다.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
동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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