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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사람을 바꿨다
입력 : 2026-03-12 오후 4:47:45
(사진=한미약품)
 
[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한미약품은 1989년 글로벌 제약사 로슈와 600만달러 규모 기술수출 계약을 따냈습니다. 한국 제약사 최초 사례였습니다. 2010년대 들어선 아테넥스, 스펙트럼과 신약 후보물질 이전 계약을 체결하면서 기술수출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2015년엔 6개 해외 기업과 8개 기술수출 계약을 맺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한국 제약기업 첫 기술수출 역사를 쓰기 전까지 한미약품의 위상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한미약품의 시작은 창업주 고 임성기 회장이 1966년 문을 연 임성기약국이었습니다. 임 회장은 성병 전문 약국 정체성을 입혀 자금을 모은 뒤 1973년 임성기제약을 세웠고, 같은 해 한미약품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제약산업 태동기에 탄생한 한미약품을 기술수출 주역으로 이끈 건 연구개발 투자였습니다. 한미약품은 기업소개란에 매추액 대비 20%의 R&D 투자를 통해 개량·복합신약과 당뇨·항암 분야 혁신신약 개발을 주도하는 대한민국 R&D NO.1 제약회사라고 자부할 만큼 연구개발을 중시합니다.
 
한미약품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국내 제약사 중 최고 수준입니다. 그만큼 많은 파이프라인을 보유했습니다. 기술수출 성과를 내기까지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와 이에 따른 파이프라인 확보가 있었던 겁니다.
 
적극적인 연구개발 기조를 세운 이는 창업주입니다. 임 회장은 생전 "신약개발 R&D는 내 생명과도 같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연구개발 투자에 진심이었습니다. "신약개발을 하지 않는 제약회사는 죽은 기업"이라는 고인의 신념이 지금의 한미약품을 만든 기반이 된 거죠.
 
약국을 찾는 손님을 분석해 성병 약을 제조하다가 굴지의 신약개발 기업 회장이 된 뒤 세계를 바라본 임 회장 개인의 역사를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새삼 와닿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제가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나 봅니다. 한미약품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의 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이야깁니다.
 
신 회장은 2024년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뒤 모녀 측과 형제 측 사이를 오가면서 국면을 주도하고, 때로는 반전한 인물입니다.
 
임 회장의 고향 후배인 신 회장은 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으로 이뤄진 모녀 측이 상속세 마련을 위해 OCI와 통합하겠다고 나서자 임종윤·임종훈 형제 측 편에 서 같은 해 3월 임종훈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습니다.
 
신 회장-형제 측 구도는 신 회장이 4개월 뒤인 7월 모녀 측으로 돌아서면서 깨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모펀드 운용사 라데팡스파트너스도 가세하면서 4자 연합이 결성됐습니다. 4자 연합은 작년 2월 임종훈 대표 체제를 끝내고 핵심 자회사에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를 앉혔습니다.
 
형제 측과 모녀 측을 오간 신 회장은 이번엔 한미약품 전문경영인 체제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팔탄공장 임원이 성추행을 한 것으로 드러나자 가해 당사자를 비호하면서 조사 사실을 누설했고, 급기야는 대표 제품 원료 수급처를 바꾸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전문경영인이나 가능한 일을 기타비상무이사인 신 회장이 한 꼴입니다.
 
박 대표 입장에선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신 회장의 경영 개입을 방관하면 경영권 분쟁 종식 결과물인 전문경영인 체제가 흔들리니까요.
 
초점을 신 회장에게 맞춰보겠습니다. 창업주가 세운 회사의 지분을 오랜 기간 보유하면서 든든한 우군이었던 신 회장은 경영권을 둔 가족 간 다툼이 벌어지자 정세를 살펴보면서 양쪽 진영을 오갔습니다. 이제는 그룹 지주사 대주주라는 명분을 앞세워 경영 전면에 나서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듯합니다.
 
신 회장이 창업주 타계 훨씬 전부터 한미약품그룹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창업주 임 회장이 이따금 고견을 구하고 신 회장은 그에 화답해 임성기 정신 구현에 도움을 줬다는 후문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창업주 별세 이후엔 그저 상황이 바뀌었고, 어느 순간 자신의 지분으로 그룹을 넘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라 추측할 뿐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을 바꾼 거죠.
 
'자리가 만든 사람' 임성기는 신약개발을 꿈꿨습니다. '자리가 바꾼 사람' 신동국은 당분간 의약품 원료를 경영 효율로만 따지는 사람으로만 기억될 겁니다. 제약기업의 사명보다 저울의 무게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한미약품그룹을 이끌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묻는다면, 답은 매우 쉬울 겁니다.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
동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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