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메일
페이스북 트윗터
인생의 견적서
입력 : 2026-02-25 오후 4:28:55
(사진=뉴시스)
 
오전 11시, 서울의 한 웨딩업체 상담실. 예비부부가 상담을 마치자 직원이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오늘 계약하시면 꽃은 업그레이드를 해드릴게요.” 견적서는 받았지만 총비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옵션이 추가될수록 금액은 달라집니다. 예산을 계산하던 예비부부는 순간 멈칫합니다.
 
같은 날, 수도권의 한 장례식장. 유가족은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장례 절차를 안내받습니다. 수의와 관, 차량 비용이 차례로 설명되지만 비교할 시간은 없습니다. 선택은 빠르게 이뤄지고, 비용은 장례가 끝난 뒤에야 확인됩니다.
 
결혼과 장례는 인생에서 감정이 가장 크게 움직이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소비를 하는 시장이기도 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웨딩 시장은 연간 약 20조원, 장례 시장은 4조5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두 시장은 공통된 특징을 갖습니다. 가격을 미리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도 웨딩 서비스 소비자 불만의 가장 큰 이유는 가격 비교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장례 역시 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 압박과 감정 속에서 협상이나 비교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비용이 비싼 이유보다 가격이 불투명한 구조가 더 오래 유지돼 온 셈입니다.
 
그동안 결혼은 허례허식, 장례는 형식 과잉 때문이라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조금 다릅니다. 소비자가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다는 점입니다. 설렘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커질수록 가격 판단은 뒤로 밀립니다. 시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해 왔습니다.
 
최근 시장에서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웨딩 플랫폼 웨딩북은 가격 정보를 공개하며 성장했고, 장례 스타트업 고이장례연구소는 정찰제와 후불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인구 고령화로 인해 수요가 많아지면서 특별한 시장이던 영역이 일반적인 서비스 시장으로 이동하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화려한 연출이 아니라 감정에 집중할 여유일지도 모릅니다. 결혼에서는 축하받는 기쁨, 장례에서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 말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필요한 것은 복잡한 견적서가 아니라 그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혜지 기자 zizi@etomato.com
이혜지 기자
SNS 계정 : 메일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