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제사 지내지 마라. 묘도 필요 없다.” 할머니는 생전에 단호하셨다. 한국 나이 100세로 눈 감으시던 그날까지 후손들의 수고를 먼저 걱정하셨다. 그 뜻대로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은 납골당도, 묘소도 없다. 복잡한 제사상도 차리지 않는다. 유해는 자연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사진 몇 장과 각자의 기억뿐이다.
명절날 가족들이 AI 기술로 재현된 할머니와 만남을 갖는 모습. (사진=구글 제미나이)
그래서 우리 집 명절은 조금 다르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사진들을 모아 간단한 영상으로 엮으셨다. 음악을 얹고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짧은 슬라이드다. 우리는 명절 아침 그 영상을 함께 본다. 형식은 단출하지만, 그 시간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나는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길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손을 잡고 찍은 사진 속 장면들은 여전히 또렷하다. 할아버지보다 15년 가까이 더 사신 덕에, 할머니의 말투와 표정은 조금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올해 명절에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조만간 할머니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최근 아버지께 생성형 AI를 알려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시더니, 금세 빠져드셨다. 해외 유튜브에 올라온 재활 스트레칭 영상을 AI로 번역해 활용하고,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비교해 본다. 구글의 제미나이와 OpenAI의 챗GPT 중 누가 더 똑똑한지 시험해 보기도 하신다. 무료 버전이지만, 아버지의 최종 평가는 이렇다. “AI에 영혼이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이번 명절의 화두는 단연 AI였다.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며 어김없이 날아들 명절 밥상머리 단골 잔소리 폭격 대신, 새로운 기술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베이킹을 배운 여동생이 구워 온 ‘두쫀쿠’를 나눠 먹으며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문득 2020년 방영됐던 MBC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가 떠올랐다. 세상을 떠난 아이를 가상현실 속에서 재현해 낸 엄마의 눈물은 화면 너머의 가짜가 아닌 현실의 감정이었다. 사진 몇 장이면 멈춰 있던 미소에 숨결을 불어넣고, 남겨진 음성 조각들을 모아 그리운 목소리를 되살릴 수 있는 기술이 일상으로 스며들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어쩌면 내년 명절엔 TV 화면 속 할머니가 그저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는 대신, 백 년의 세월이 깊게 팬 덤덤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 올지도 모르겠다.
실제 성묘의 풍경도 변하고 있다. 일부 호국원에서는 비석 옆 QR코드를 통해 고인의 사진과 생전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먼 거리에 있어도 온라인으로 참배가 가능하다. 이동의 피로는 줄고, 기억은 디지털로 보존된다.
중국에서는 ‘사이버 춘절’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귀성 대신 도시에 남아 AI 캐릭터와 명절을 보내고, 모바일 화면으로 가상 향을 피운다. 물리적 공동체는 느슨해졌지만, 디지털 연결은 오히려 촘촘해지고 있다.
제사상이라는 무거운 전통을 덜어낸 빈자리에는 차가운 기술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기술의 끝이 향하는 곳은 결국 온기 가득했던 사람의 기억이다. 시대가 변하고 추모의 방식이 0과 1의 디지털로 치환된다 해도, 남겨진 이들은 기어이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으려는 쪽을 택한다. 픽셀로 복원된 미소와 알고리즘이 빚어낸 목소리일지언정, 서로를 기억하려는 애틋한 마음이 명절이라는 시간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