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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소비하는 사람들
입력 : 2026-01-29 오후 2:53:31
한국인처럼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을 것 같습니다. 패션이든, 음식이든, 방송 프로그램이든 어떤 유행이든 빠르게 만들어내고 소비합니다.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사는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성격이 급하다는 평가나 '빨리빨리' 문화도 이런 특징을 설명하는 데 한몫하는 듯합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서서 가는 줄과 걸어가는 줄이 자연스럽게 갈라집니다. 안전을 위해 서서 이동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어도, 많은 사람들은 계단처럼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갑니다. 언뜻 보면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급한 성격의 사람들이 유행하는 아이템을 구매하는 일에는 놀라울 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유명 음식점, 매장을 방문하거나 요즘 유행인 두바이 쫀득 쿠키를 사기 위해 '오픈 런'을 감수하고 긴 줄을 섭니다. 지금은 유행이 한풀 꺾였지만, 한때 큰 인기였던 '런던 베이글 뮤지엄'의 빵을 지인이 사다 주며 오전 7시에 줄을 서서 9시가 되어서야 구매할 수 있었다고 말했던 기억도 납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MBTI 유형 중 소위 '계획형(J)'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여행 일정표를 보면, 10분 단위로 계획이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조차 조그맣고 양에 비해 비싼 '두쫀쿠'를 위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기꺼이 기다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맞지 않는 풍경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일상에서 '시간 거지', '시간 도둑'이라는 표현이 꽤 자연스럽게 쓰인다는 점이 떠올랐습니다. 시간 역시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투자할 수 있는 자산처럼 인식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절약해야 할 자원'이자 동시에 '투자할 수 있는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그 판단 기준은 효율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길의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시간을 쓰는 행위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유행을 소비하고,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며, '나 그거 먹어봤다'는 경험을 인증하고, 대화의 공통분모를 확보할 수 있는 대상 앞에서는 몇 시간의 대기도 손해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 자체가 이미 소비의 일부가 되고, 그 시간을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되는 셈입니다.
 
결국 한국인은 단순히 '빠른' 사람이기보다는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시간은 단 1분도 아깝지만, 유행이라는 이름의 경험 자본을 쌓는 데에는 몇 시간이든 기꺼이 씁니다. 유행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빨리빨리 문화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언제 멈추고, 언제 달릴지를 냉혹하게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3일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점에 오픈한 무신사 스토어 앞에서 고객들이 입장을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사진=뉴시스)
이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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