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메일
페이스북 트윗터
또다시 '수탈된 대지'
입력 : 2026-01-09 오전 10:54:17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들에게 붙잡혀 이동 중인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그 후에도 폭력은 그치지 않았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수탈된 대지』에서 쓴 문장 중 하나입니다.
 
『수탈된 대지』는 제국주의 시절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행한 노예제, 인권 착취가 경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으로도 분화했다는 문제를 부각한 책입니다.
 
문화적 경계로 구분하는 대륙 라틴 아메리카와 지리적 개념으로 나누는 중남미라는 지역명은 구대륙과 만나는 순간부터 대상화됐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신대륙 발견'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인식은 인도를 찾아 떠났던 유럽 사람들의 시선에서만 가능합니다. 유럽 중심의 세계관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착취 대상 지역을 새롭게 찾아냈다는 뜻인데, 사실 라틴 아메리카는 예전부터 존재했던 땅입니다. 여기서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은 졸지에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된 미지의 생명체가 된 거죠. 아시아 문화와 전통을 백인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즘 작동 방식과 동일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인의 고착화한 시선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박제 오리엔탈리즘, 동양인마저도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해 스스로를 가두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으로 나뉘었듯 중남미인들을 수탈하는 주체는 유럽 세력에서 현지 자본가, 인접한 국가로 복잡하게 세분화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 체 게바라 같은 이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 노력하긴 했으나 중남미 땅은 수탈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중남미는 변화를 맞이합니다. 수탈의 주체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뀐 거죠.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자신의 뒷마당쯤으로 여기고 정치·사회·문화·경제 전 방면에 걸친 간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정권을 미국이 좌우하는 사례도 여럿 있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뻗친 미국의 영향력이 당연하게 여겨질 즈음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수탈된 대지』를 건넸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착취했던 중남미 역사를 제대로 보라는 고발장이자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담은 선전포고였습니다.
 
수탈민이 착취자에게 이 책을 건넨 지 17년 만인 2026년 1월 역사는 되풀이됐습니다. 미국은 마약을 이유로 주권국가인 베네수엘라에 쳐들어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했습니다. 자신을 "여전히 내 나라의 대통령"이라 칭한 마두로 대통령은 타국에서 마약사범으로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수탈된 땅에서 자란 중남미인의 운명이 정복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명확히 드러냅니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 문명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뺏으려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구분이 뚜렷합니다. 오히려 총과 칼로 지배하던 시절보다 수탈의 명분은 다양해졌고, 착취의 기술은 더 정교해졌습니다.
 
마두로 대통령을 손에 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음 먹잇감으로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지목했습니다. 그의 좌장인 정부 인사는 성조기로 뒤덮인 그린란드 이미지를 SNS에 게시해 미국의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도 했죠.
 
『수탈된 대지』의 원제는 'Las venas abiertas de América Latina'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풍부한 자원이 외부 세계로 유출되는 중남미의 당시 현실을 혈관이 열려 피가 철철 나는 땅으로 비유한 겁니다.
 
갈레아노는 출판 20여년이 지나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라틴 아메리카는 굴욕과 빈곤이 운명지워진 세계의 한 지역인가, 그것은 누구에 의해 운명지워진 것인가, 신의 저주인가, 또는 자연의 저주인가"라고 짚었습니다. 흘러온 역사를 보건대 중남미 땅의 혈관을 열어젖힌 건 항상 외부인이었습니다.
 
우린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무력으로 피 흘리는 땅이 영속하는 시대에.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
동지훈 기자
SNS 계정 : 메일 페이스북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