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정부는 유료방송 품질평가 결과를 발표합니다. 유료방송 사업자 간 경쟁을 촉진하고 이용자 편익을 높이는 하나의 방법이죠.
그런데 유료방송 품질평가 점수를 뜯어보면 사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채널 전환시간은 0.4초냐 0.5초냐의 싸움이고, 영상 체감 품질 점수는 다 같이 4.6~4.7점대에 모여 있습니다. 서비스 이용 만족도 역시 67점 안팎에서 엎치락뒤치락합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누가 압도했다고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수준입니다.
유료방송 시청 화면. (사진=뉴스토마토)
그런데 이 점수표가 나오면 업계의 공기는 갑자기 날카로워집니다. 자기 회사가 앞선 항목에서는 이름이 제목 맨 앞에 나가야 하고, 다른 점수가 조금이라도 높은데 뒤에 배치되면 바로 항의가 들어옵니다. '왜 우리가 먼저 안 나오느냐'는 질문이 점수표보다 더 빠르게 날아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감함은 국내 유료방송 시장이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비슷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죠. 네트워크도, 화질도, 속도도 이미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기술 경쟁은 사실상 결승선을 통과했고, 남은 건 소수점 아래의 차이입니다. 0.1초, 0.5점, 몇 초의 광고 시간. 이 미세한 틈에서라도 1위라는 이름을 붙여야 존재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쟁할 게 없으니 경쟁을 만들어내는 셈이죠. '체감은 우리가 앞섰다', '기술은 우리가 선두다'라는 문장이 필요해집니다. 숫자는 비슷해도, 네이밍은 양보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점수보다 순서가 중요해지고, 결과보다 제목이 더 민감해집니다.
어쩌면 이 풍경 자체가 유료방송 시장의 현주소입니다. 압도적인 승자도, 뚜렷한 패자도 없는 시장. 모두가 비슷한 점수표 위에서 1위라는 단어를 차지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서가 아니라, 경쟁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