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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놀이가 끝난 뒤
입력 : 2025-12-09 오전 10:42:06
최근 만난 취재원이 제주도 이야기를 하다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제주도 사람은 서로를 좋게 얘기하는 법이 없어요. A라는 사람을 물어보면 쓰레기라 하고 B를 물어보면 사기꾼이라고 하죠.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 가서 역으로 물어보면 마찬가지로 말해요.” 그는 제주도에 유독 ‘도민 화합 프로그램’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언론사도 비슷하더라고요.” 
 
JTBC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사진=JTBC)
 
곱씹어보면 기자들끼리 사이가 좋은 조직은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일반 회사가 사원, 대리, 과장 단계를 거쳐 결재가 모이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면, 언론사에서 기사는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간다. 바이라인을 내걸고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며,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증명해야 하는 구조다. 장점도 있다. 기수가 있기는 해도 선후배 관계는 다른 조직보다 비교적 수평적이다. 후배가 선배를 비판할 수도 있고, 선배보다 먼저 단독 기사를 쓰기도 한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어렵기만 했다. 오늘 한 일을 결과로 스스로 만들어야 했고 출근해도 자리가 없는 직장이 어색했다. 한겨울 어느 날, 모 기업 기자실은 회사 사무실을 가로질러 한참 지나가야 했는데,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식을 나눠 먹고, 생일을 축하해주는 풍경을 보며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동기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동기와 휴가 때 같이 해외여행을 갔다. 
 
이직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직장 내 관계에도 정을 주지 않게 됐다. 지인이 취미 활동인 배드민턴을 직장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놀랍기도 했다. 주말에 골프 라운딩을 같이 나간 사촌 언니에게 공을 선물했더니 “회사에서 챙겨준 거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황당해서 한 박자 늦게 웃음이 나왔다.
 
요즘 채용 공고에 “가족 같은 분위기”를 자랑처럼 기재해놓으면 조직문화가 최악이란 뜻으로 읽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직장은 각자의 역할이 분명한 공간이고, 관계 역시 역할 위에서 만들어진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저서 『사내정치의 기술』에서 직장 생활을 ‘의자 놀이’에 비유했다. 음악이 멈출 때마다 의자는 하나씩 줄어들고, 누군가는 자리를 잃는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김 부장은 입사 이후부터 백 상무와 형제처럼 지냈다. 형 앞에서 “똥꼬쇼”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결정적 순간, 형에게서 버림받는다. 김 부장 또한 형제처럼 지냈던 입사 동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이를 외면했고 동기는 결국 자살 시도를 한다. 필요와 선택 앞에 관계는 너무 쉽게 무너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부장이 사기까지 당하고,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은 뒤 홀로서기를 결심하며 찾아간 사람 역시 입사 동기다. 가장 잔인한 선택이 오갔던 관계가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이어지는 장면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봤다.
 
회사 안의 관계는 대부분 조건부다. 모든 조건이 벗겨진 뒤에도 다시 손 내밀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직장 관계가 아니라 ‘인간관계’일 것이다. 김 부장은 ‘성공’은 잃었지만, 죄책감을 느낄 줄 아는 마음만큼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기준을 지킨 그는 사람을 원망하기보다,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김 부장처럼 모든 것을 잃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다행스럽다. 조금 이른 질문을 해본다. 관계가 모두 사라진 뒤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윤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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