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비싼 장비를 사도, 대학교에서는 그게 일회용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도체는 대규모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산업입니다.”
나노종합기술원 엔지니어들이 지난 3일 오전 대전 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 내 공공 팹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안정훈 기자)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 대학 현장의 어려운 현실을 이같이 전했다. 반도체 장비는 워낙 고가라 큰맘 먹고 들여오더라도,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 장비를 조작하다 고장이라도 내면 바로 사용이 중단될 수 있다. 수리를 하자니 유지관리비 역시 만만치 않다.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악순환이 이어진다. 학계에서 고가의 장비가 ‘일회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9월 SK하이닉스는 초미세 반도체 회로 구현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향후 2년 내로 약 20대 구매하기로 했다. EUV 장비는 한 대당 3000억~5000억원에 달하는 초고가 반도체 장비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감히 살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고가다. 가격 자체가 ‘넘사벽’이다 보니 중소기업이나 학계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다.
중국처럼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다면, 일각에서는 해외의 선례를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이곳저곳에 찔끔 지원해봤자 실효성이 없으니, 한 곳에 집적해서 중소기업이나 학계가 사용할 수 있는 큰 공공 팹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기존의 공공 팹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시설을 만들어 최신 장비를 구축하고 인재 육성과 연구개발의 중심지로 삼자는 취지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기업 간, 국가 간에 힘을 합하기도 한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업 부흥을 위해 도요타, 소니, 키옥시아, 소프트뱅크 등과 라피더스를 공동 설립했고, 미국과 유럽은 각각 NY 크리에이츠(NY Creates), 아이멕(Imec) 등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반도체특별법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하며 연내 제정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각종 법안으로 정부 차원에서 기업을 지원하는 선진국들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인 상황이다.
대규모 재정 투입이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늦은 만큼 참고할 만한 해외 선례는 더 많다. 라피더스의 성공 여부, 중국 기업들의 성장 속도, 미국 정부가 오픈AI 등과 추진 중인 스타게이트 등은 향후 한국이 참고해야 할 주요 사례다.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으로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기반시설 마련을 위한 법적 토대도 형성됐고, 정부는 5년 단위 기본계획 수립 의무화 등 체계적 지원의 틀을 갖춰가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산업은 기업·정부·학계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분야다. 특히 인재 양성과 공정 개발은 학계의 역할이 절대적이지만, 산학 현장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으로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산업 지원을 위한 기반이 다져진 지금, 산학계를 위한 또 하나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