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동전 지갑을 쓰지 않게 됐습니다. 무겁기도 하고 10원, 100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없어서입니다. 신용카드 결제가 일상이 되면서 가끔 생기는 동전은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애물단지가 됐습니다. 예전에는 은행에 가져가 예금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예약을 해야 하거나 정해진 날에만 받아주는 곳도 있어 허탕을 칠 때가 있습니다. 동전이 거의 쓰이지 않는 시대가 되다 보니,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아이들은 80~90년대생에게 익숙한 '김민지 동전 괴담'조차 모를 수도 있겠다는 싱거운 생각도 듭니다.
화폐 발행으로 얻는 이익을 '시뇨리지'라고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조폐권을 가진 영주(Seignoir)가 새 화폐를 주조하며 얻던 이익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주화보다 지폐 발행이 훨씬 더 큰 수익을 냅니다. 미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1달러 지폐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3.2센트로, 발행 수익률이 96.8%에 이릅니다. 10달러와 100달러는 시뇨리지 효과가 더욱 크며, 대량 발행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반대로 제조 비용이 액면가를 넘어설 경우에는 '역(逆)시뇨리지'가 발생합니다. 미국에서는 12일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1센트(페니) 동전이 공식적으로 생산 중단됐습니다. 1센트 제조 비용은 1.69센트로 매년 5600만달러의 손실을 내왔습니다. 1793년 첫 발행 이후 232년간 유지됐던 1센트 동전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입니다. 캐나다·호주·아일랜드·뉴질랜드도 이미 최저 단위 동전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우리나라도 2005년부터 1원과 5원 동전의 유통 목적 발행을 멈췄습니다.
국내 10원짜리 동전 제조 비용은 30~50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10원의 종말'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금본위제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세계는 이제 중앙은행디지털통화(CBDC)나 디지털 달러 같은 디지털 화폐 발행 논의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아직 도입 계획이 없지만 국제 흐름은 이미 뚜렷합니다.
이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현실화하는 나라는 중국입니다. 디지털 위안(e-CNY)은 이미 수억 명이 사용하는 준상용화 단계에 있습니다. 홍콩·태국·UAE와 함께 추진 중인 'm-CBDC 브리지 프로젝트'는 달러 기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를 우회하는 실시간 국제 결제를 목표로 합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민간 발행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을 전면 금지하고 공적 디지털 통화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질서의 일부를 대체해 통화 패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디지털 통화가 도입되면 시뇨리지 효과는 더욱 확대됩니다. e-CNY는 발행 비용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고, 상업은행 예금 일부를 흡수해 기존에 상업은행이 가져가던 금리·결제 수익을 중앙은행으로 이전합니다. 결제 데이터도 실시간으로 확보가 가능해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쓰는지 중앙은행이 모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실시간 '빅브라더'가 등장하는 셈입니다.
1970년대 초 소량만 발행된 10원 주화가 최고 75만원에 거래됐던 사례도 있습니다. 이 흐름이 이어진다면 동전은 언젠가 우표처럼 수집 대상이 되거나, 박물관에서만 마주하게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1센트 동전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각국의 경제 헤게모니 경쟁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함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5월4일 울주군에서 열린 '2025 울산 옹기축제'에서 어린이가 동전 퐁당게임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