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지금까지 몇 번의 중요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에 있고요.”
엔비디아. (사진=연합뉴스)
최근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란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쿤이 제시한 개념으로, 새로운 이론이나 기술은 지식의 축적에 따른 점진적 진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계기로 등장한다는 의미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시프트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1970~1980년대 PC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의 보급, 2000년대 이후 스마트폰의 대두가 그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기기의 등장으로 반도체 분야는 근본적인 변곡점을 맞았고, 시장은 성장을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됐다.
대대적인 변화가 생기는 시점인 만큼 계기도 명확하다. PC 시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그 중심에 있었고, 인터넷의 보급에는 월드와이드웹(WWW), 스마트폰에는 애플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반도체 분야의 결정적 전환점을 제공했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중요한 지점은,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이한 기업들의 대응 방식이다. 인텔은 CPU를 개발하면서 새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로 부상했고,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대에 갤럭시를 들고 나와 애플의 유일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이제 네 번째 패러다임 시프트의 순간이 도래했다. 인공지능(AI)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수십조원을 투자해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엔비디아와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AI 가속기를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반도체를 넘어 전 산업에 걸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기업 간 주도권 경쟁도 가속화되고 있다.
챗GPT의 등장 이후 현재까지 AI의 수혜를 가장 크게 누린 기업은 엔비디아일 것이다. PC용 그래픽카드 기업에서 출발한 엔비디아는 이제 AI 반도체의 대명사가 됐다. 업계에 따르면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80%를 웃돈다.
엔비디아 대성공의 뒤에는 K반도체가 있다. AI 칩의 성능을 좌우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핵심 공급자로 자리하고 있다. 미국 초대형 프로젝트 ‘스타게이트’에 수십만 장 규모의 HBM을 공급하기로 한 것을 보면, K반도체의 존재감은 분명하다.
다만 여전히 한국 기업들은 ‘공급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 AI 시대의 주도권은 단순히 메모리를 납품하는 기업이 아니라, 기술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기업에 돌아간다. 몇몇 빅테크 기업의 파트너에 머무르지 않고 생태계를 다변화하며, 시장을 주도할 전략이 요구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