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강영관 기자] 며칠 전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문 한 장을 붙였다.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기간 5주", 그 문장 한 줄이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우리 집은 7층이다. 1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층이라 하기엔 애매한 층수.
처음엔 '운동 삼아 오르내리면 되지!' 싶었는데, 막상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상황은 달랐다. 퇴근길 장을 본 날엔 두 팔이 저리고 회식을 마친 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에 올라갈 때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엘리베이터라는 문명의 장치 하나가 사라지자 하루의 풍경이 통째로 바뀌었다. 처음 며칠은 불편함보다 당황스러움이 컸다.
택배 기사님이나 배달 기사님이 "물건을 문 앞까지 올려드릴까요?" 물으면 미안한 마음에 "그냥 1층 로비에 두세요"라고 대답했다. 1층과 7층을 오가기는 은근 '귀찮은 마음'이 발동했기에 택배나 배달 음식 주문은 최대한으로 줄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버튼 하나로 해결되는 삶'에 익숙해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3주가 지난 지금. 계단을 오르내리며 얻은 건 단순한 체력 이상이었다. 계단참에서 숨을 고르다 보면 하루가 자연스럽게 되감기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보낸 시간, 동료와의 대화, 쓸데없이 열었던 쇼핑 앱 화면까지.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 대신, 내 몸과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는 늘 '빠름'을 약속한다. 누르는 즉시 작동하고, 클릭하면 도착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편리함을 누리지만 동시에 '몸을 쓰는 삶'을 점점 잃어버린다. 엘리베이터는 단지 수직 이동의 도구가 아니라 도시가 인간의 시간을 단축하게 한 상징이다. 그리고 그 편리함은 모두에게 균등하지 않다.
7층을 오르내리는 일이 나에겐 고단한 운동이지만 누군가에겐 불가능한 높이일 수 있다. 유모차를 밀어야 하는 부모, 무릎이 불편한 노인,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이 불편은 단순한 '운동 효과'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오를 수 있었기에 불편을 '경험'이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편이 곧 '제한'이 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런 생각이 들자 5주간의 불편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편리함의 이면에는 언제나 불평등이 숨어 있었다. 내가 무심코 누르던 버튼 하나에는 누군가의 노동과 인프라, 그리고 감춰진 불편이 깔려 있었다.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편리함의 혜택을 충분히 누려온 사람의 여유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도시의 속도가 달라졌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불편했지만 이상하게 사람 냄새가 났다. 계단을 오르며 이웃과 마주치고 서로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편리함은 사람을 고립시키지만, 불편함은 가끔 사람을 다시 연결하게 한다. 세상은 멈추지 않더라도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멈춤이, 우리가 사는 도시를 다시 '사람의 속도'로 되돌리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럼 엘리베이터 교체가 끝나더라도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음…그건 아니올시다.
강영관 기자 kw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