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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의 도시
입력 : 2025-10-31 오후 3:05:59
신조어가 넘쳐나는 요즘, '런라니', '자라니', '킥라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가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라니'는 도로 위의 고라니를 뜻합니다. 고라니는 위협을 받으면 도망치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 서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 특성을 빗대어 러닝크루, 자전거, 전동킥보드 등 도심을 무질서하게 점령하고 타인의 안전과 질서를 방해하는 존재들을 '○라니'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6월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서는 전동킥보드를 타던 10대가 60대 부부를 들이받아 아내가 숨졌습니다. 법원은 29일 가해 청소년에게 금고 8개월과 벌금 2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18일 인천 연수구에서는 30대 여성이 어린 딸을 보호하려다 킥보드에 치여 중태에 빠졌습니다. 사고를 낸 청소년들은 모두 면허가 없었고, 1인 탑승 규정을 어겼습니다. 그럼에도 킥보드 등 개인형이동수단(PM)의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법안 7건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킥보드는 자전거보다 쉽게 탈 수 있고, 거리 곳곳에 방치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걷는 공간에서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곧바로 차량과 다를 바 없는 위험이 됩니다. 도로교통법상 전동킥보드는 원동기장치자전거로 자전거도로 외 인도 주행은 금지돼 있으며, 차량으로 인정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만 16세 이상 1인 탑승이 원칙이고 면허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사고가 나더라도 미성년자에 대한 형사처벌은 대체로 가볍고, 만 14세 미만은 촉법소년으로 분류돼 사실상 처벌을 피합니다. 
 
전동킥보드 사고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프랑스는 2023년 주민투표를 통해 전동킥보드 대여 서비스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호주 멜버른도 2024년 공유 킥보드를 퇴출했고, 싱가포르는 인도에서 전동킥보드를 이용하다 적발될 경우 2000싱가포르달러(약 220만원)의 벌금이나 최대 3개월 이하의 징역형에 처합니다. 각국은 개인 이동수단의 편리함보다 공공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국내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없지 않습니다. 인천 연수구는 사고 이후 킥보드 금지 구역 지정을 추진 중이고, 서울시는 홍대입구역 인근과 서초구 반포 학원가를 '전동킥보드 없는 거리'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반포동 학원가 인도 위에는 여전히 면허 없는 청소년들이 킥보드를 타고 질주하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대륜에 따르면 전동킥보드 사고는 2021년 1735건에서 2023년 2389건으로 늘었고, 2024년에도 2232건이 발생했습니다.
 
요즘 가뜩이나 좁은 인도에 각종 '○라니'뿐 아니라 배달 오토바이까지 더해져 보행 안전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혼자만 신속하게 이동할 권리'와 '안전하게 다닐 권리'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킥보드 자체를 금지하는 주민투표라도 부치고 싶지만 일단은 시민 대상 도로교통법 인식 강화, 면허 인증제도의 실질적 운영이 병행돼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기본적인 안전교육을 의무화하고, 공유킥보드 사업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제도도 필요합니다. 시민이 안전하게 걷는 도시, 그것이 '○라니의 도시'가 아닌 '사람의 도시'로 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31일 서울 마포구 주택가 인도 한가운데에 전동킥보드가 방치돼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이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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