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반면 IT 강국이라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번의 화재로 공무원 12만5000명이 실사용하던 디지털 기록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조선 초기 실록은 춘추관과 충주 사고 두 곳에 나눠 보관됐습니다. 세종 27년(1445년)에 이르러 성주·전주 사고를 더해 네 곳에 분산 보존했지만,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고 전주 사고본만 남았습니다. 그 교훈으로 조선은 다시 실록 네 부를 새로 써 깊은 산속으로 옮겼습니다. 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정족산 다섯 곳이 훗날 국보로 남은 실록의 요새가 됐습니다.
반면 2025년의 한국 정부는 "백업은 중요 시스템만"이라는 내부 기준에 따라, 74개 기관 19만 공무원이 가입한 'G드라이브'를 단일 서버에 저장했습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G드라이브가 전소하자, 정부는 “외부 백업이 의무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G드라이브는 '다'급 시스템, 즉 백업 대상에서 제외된 저성능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기반 저장소였습니다. 같은 전산실에 있던 백업 장치마저 불에 타면서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이번 화재로 소실된 자료는 858테라바이트, A4용지 2조장이 넘는 분량입니다.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수많은 공무원들의 정책 보고서, 내부 검토 문서, 아이디어와 기록이 통째로 사라지고 국가 행정망이 마비됐습니다. 특히 2016년 공무원 시험 부정 사건 이후 '개인 PC 저장 금지' 방침을 내린 인사혁신처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전문가들은 "백업은 보험과 같다. 사고 전엔 절대 예산을 안 쓴다"고 지적합니다. 정부의 데이터 관리 체계가 '중요도'로만 서열화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중요도의 판단이 너무 행정 중심적이었다는 점이 문제라고 합니다. 기술적으로 백업은 가능했지만 비용과 효율성만 따져 미뤄왔던 결과입니다.
조선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실록을 복제하고 분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600년이 지나도록 실록이 남은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화재 한 번에 국가 기록이 증발했습니다. 정보화 사회의 핵심 자산은 데이터입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의 생명은 백업입니다.
"백업은 중요 시스템만"이라는 행정적 발상이 아니라, "모든 데이터는 중요하다"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실록이 그랬듯, 가성비를 따지기보다 기록 그 자체를 소중히하는 마음이 기술보다 앞서야 합니다. 얇은 종이로 이뤄진 실록은 600년을 버텼습니다. 하지만 정보의 최첨단을 달리는 G드라이브는 고작 10여년 만에 화재로 소실됐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기록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시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전산실 화재로 정부24, 온라인 복지 서비스 등 주요 업무시스템이 중단된 9월29일 서울 종로구청 무인민원발급기에 사용 중단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