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지웅아, 엄마 돌아가셨어."
(사진=뉴스토마토)
에세이나 르포를 쓸 때는 당시 모든 기록을 되짚어보는 편입니다. 디스크 조각 모음처럼, 흩어진 기억이 맞춰질수록 글은 더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 통화 녹음만큼은 다시 들을 용기가 없습니다.
기사를 쓰는데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반차 하루와 연차 사흘을 내고 곧바로 울산에 내려갔습니다. 장례식장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담배 피울 곳 찾아 서성댔습니다. 양치를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단정히 모습을 가다듬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여자친구가 씩씩하게 저를 맞았고, 어머님 영정 앞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예비 장모님.
영정 앞에서는 어머님께서 평소 즐겨 들으시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시연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시연이를 만났을 때의 놀라움. 그가 듣던 음악은 하나하나 특별했고, 그 특별함이 뒤늦게야 어머님과 닿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은 단순히 시연이를 세상에 낳아주신 분이 아니라, 지금의 시연이가 지금의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한 바탕이었습니다.
현명함과 강인함.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능력. 특히 사랑은 시연이가 어머님으로부터 배우고 제게 가르쳐준 것이기도 합니다.
6년. 시연이가 병간호를 도맡은 시간입니다. 홀로 상경해 서울대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 자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걸려 올 전화를 기다리느라 작은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곤 했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웠던 공간. 그 병원의 무거운 공기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여자친구와 달리 저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는데도.
분명히 "곧 내려오겠다"고 인사드렸었는데. 어머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또 울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던 마지막 날, 다행히 여자친구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어머님께서 말씀은 하지 못하셨지만,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셨기를. 그래서 안심하고,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영원한 안식을 찾으셨기를 빕니다.
저는 왜 그리도 많이 울었던 걸까요?
가족이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