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휘두른 것은 손이 아니라 오래 쌓인 감정입니다.
최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벌어진 피자 가맹점 칼부림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감정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인테리어 문제에서 시작된 사소한 갈등이 살인이라는 극단적 사건으로 번졌다는 사실은 폭력의 출발점이 논리나 이해관계가 아닌 감정의 파국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참아온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세상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배우 한석규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런 극단적이고 가슴 아픈 일들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의 행동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때로 이성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화를 내지 말라', '참아라'는 말을 듣고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한 서운함과 설명되지 않은 억울함, 반복되는 무시는 시간이 지나며 덩어리가 되고 결국 '분노'라는 이름으로 응축됩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감정은 어느 순간 폭력이라는 형태로 분출됩니다.
감정이 가장 자주 쌓이는 공간은 일터입니다.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곳에서 사람들은 참고 또 참습니다. 잘못하지 않아도 혼이 나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각은 깊은 분노로 이어지고 자존심이 깎이는 경험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생계를 위해 견뎌야 하는 공간이 동시에 분노를 축적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화병'이라는 단어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미국정신의학회(APA)는 한국인의 화병을 문화 증후군으로 분류했습니다. 가난과 전쟁, 권위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화를 내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기억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참아온 화는 몸을 병들게 합니다. 두통, 소화불량, 가슴 두근거림 같은 신체 증상뿐 아니라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거나 깜짝 놀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억눌린 감정은 결국 몸과 마음을 잠식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 불편함을 솔직히 표현하는 용기, 감정을 쌓아두지 않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갈등이 폭력으로 치닫기 전에 감정을 안전하게 조율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입니다.
칼을 든 것은 손이 아닙니다. 참아온 화입니다.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언제든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폭력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칼을 뺏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참아온 감정이 폭발로 이어지기 전에 우리는 감정을 직면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는 같은 사건을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관악구 피자가게 살인사건 피의자 A씨가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