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헉." 소리가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오른쪽 담벼락으로 붙습니다. 꽁지머리를 좌우로 흩날리는 '러너(뛰는 사람)'가 지나갑니다. 이번엔 앞에서 남녀 5명이 일렬로 뛰어옵니다. "전방에 사람 있습니다!"를 외치곤 쌩하니 사라집니다.
오랜만에 찾은 북촌에서 20분 동안 어림잡아 50명 넘는 '러너'를 지나쳤습니다. 깜박이는 신호등이 아니고선 뛰는 걸 싫어해 이렇게 유행인지 몰랐습니다. 다들 기능성 옷이 땀에 젖어 얼룩덜룩하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얼기설기 달라붙었습니다.
그럼에도 찡그림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웃습니다. 찾아보니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 등 고강도 운동을 30분 이상 지속할 때 일시적으로 행복감, 통증감소, 불안감 완화 등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운동할 때 증가하는 베타 엔도르핀의 영향 때문인데요. 마약류 약물을 복용할 때 느끼는 행복감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정치권에서도 일종의 러너스 하이가 나타납니다. 처음엔 대선 유세 현장에서, 다음엔 전당대회에서, 최근엔 장외집회에서 봤습니다. 지난 21일 국민의힘이 동대구역 광장에서 장외집회를 열었습니다. 국민의힘 추산 7만명이 참석했습니다.
300km 떨어진 국회에서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현장을 보는데도 열기가 후끈했습니다. 당은 미리 집회 성격에 맞지 않는 피켓과 깃발 사용을 제한했지만 '윤(석열) 어게인', 'STOP THE STEAL(부정선거 멈춰라)' 문구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단상에 오른 장동혁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 위에,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며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습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음흉한 표정으로 이재명과 김어준의 똘마니를 자처하고 있다" "반헌법적인 정치테러 집단의 수괴"라며 수위 높은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지자들의 환호가 커질수록 장 대표의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10분 좀 넘는 연설이 끝난 뒤 장 대표는 10km는 달린 듯한 상기된 얼굴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연신 격앙된 외침에 목소리도 갈라졌지만 눈빛만은 빛났습니다. 만족감이 느껴지는 옅은 미소도 남겼습니다. 며칠 전 산책에서 본 러너들과 비슷했습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어게인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습니다. 땀을 흘린 만큼 몸이 가벼워지는 달리기와 다르게 이날의 러너스 하이는 비상계엄의 족쇄가 더욱 무거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