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에선 특별한 여행지입니다. IP 강국이어서도 아니고 스시가 맛있어서도 아닙니다. 뉴스가 아닌 일상 속의 야스쿠니 신사를 엿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5일 찾아간 야스쿠니 신사는 성공한 가해자의 자기합리화와 전쟁 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이었습니다.
도쿄도 지요다구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가려면 다이이치 도리이(제1 신사문)을 지나가야 합니다. 일본에서 제일 높은 25m짜리 도리이는 그 아래를 오가는 모든 생명 위에 군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문을 지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근대 일본 육군의 창설자 오무라 마스지로(1824~1869) 동상과 지름 1.5m 국화 문장이 달린 신몬(정문)을 지나면 저 앞에 펄럭이는 일장기와 하이덴(배전)이 나타납니다.
지난달 25일 야스쿠니 신사 배전으로 참배객이 향하고 있다. 배전은 1901년 세워졌다. 참배는 보통 이곳에서 한다. (사진=이범종 기자)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와 난징대학살의 주범 히로타 고키 등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모셔졌고 한국인 2만1000명이 합사돼 죽어서도 생지옥에 살아야 하는 곳. 하지만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은 참배 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의 굳건한 위치를 확인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본당 옆에 붙은 가장 큰 건물은 산슈덴(참집전).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전몰자에게 일인당 공물료 5000엔 이상을 내는 참배객 접수처입니다.
공물료 안내판은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돼 있는데, 가해자의 당당함을 보는 듯해 불쾌했습니다.
가해자의 논리는 한국어로 번역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내서에 적혀 있습니다. 신사 측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신으로 모셨다며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부각했는데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내문. A급 전범과 주변국 피해자의 합사를 정당화하는 궤변으로 가득하다. (사진=이범종 기자)
이들은 안내서에서 "일본인으로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대만 및 한반도 출신자, 시베리아 억류 중에 사망한 군인 및 군무원, 태평양전쟁 종결 시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된 이들의 영혼도 함께 모시고 있다"며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영혼을 조국을 위해 순직한 고귀한 영령으로 모두 평등하게 기리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창건 목적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밖에도 안내서는 주권국 대한민국도 피해자 유족도 원치 않는 전범과의 합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가득합니다.
합사에 대한 궤변을 떠나 최소한의 뉘우침은 보이고 있을까. 신사 경내의 박물관에선 태평양전쟁 말기 자살 특공대(가미카제)로 이용된 제로센 전투기와 대포 등이 자랑스레 전시돼 있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구미 제국의 아시아 침략을 막기 위한 결단으로, 한일 강제 병합을 양국 간의 평화로운 평등 조약으로 왜곡했단 사실이 보도로 익히 알려졌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박물관 1층에 전시된 제로센. (사진=이범종 기자)
박물관 앞엔 그 유명한 '팔 박사 현창비'가 대문짝만 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라다 비노드 팔은 도쿄 전범재판 당시 인도 대표 재판관이었는데요. 야스쿠니 신사는 그가 유일하게 피고인 전원 무죄를 주장한 공적을 기려 2005년 이 현창비를 세웠습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007년 인도를 찾아 많은 일본인이 팔 판사를 존경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일본 우익은 팔 판사의 무죄 주장에 집착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아베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는 A급 전범으로 1966년 팔 판사를 일본에 초청해 일왕의 최고 훈장 수여를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전쟁 범죄 미화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팔 박사 현창비'. (사진=이범종 기자)
야스쿠니 신사는 조국 수호에 목숨 바친 이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게 목적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4시간 동안 둘러본 야스쿠니 신사는 아름다운 건물과 조경으로 관람객의 눈을 만족시키려는 듯했습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노인까지 끝없이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신사의 지배력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설치된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 동상. (사진=이범종 기자)
일본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IP 보유국입니다. 언제나 평화를 말하지만, 전쟁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인식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대단한 일본분이었다가 한순간 일본놈이 되는 일본인. 그들의 나라 일본의 섬뜩함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