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유출을 두고 한국과 중국 기업이 미국에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삼성디스플레이와 중국 BOE의 소송전에서는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디스플레이는 CSOT에도 기술 3건에 대한 무단 사용 및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LG디스플레이는 지난 6월 중국 티안마 및 그 자회사들을 상대로 총 7건의 디스플레이 기술 특허 침해 소송에 착수한 바 있다. 한국과 중국은 기술 탈취를 놓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지난달 이종포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개발팀 상무가 서울 삼성 강남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마이크로 RGB TV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사실, 기술 유출과 탈취는 모든 나라와 기업에서 암암리에 시도되고 있다. 일본 기업이 대만 TSMC의 기술 유출을 시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대만 검찰에 따르면 TSMC에서 퇴직한 천모씨가 도쿄일렉트론으로 이직한 후, 다른 TSMC 직원 2명으로부터 2나노미터 공정 기술 도면을 넘겨받았다. 중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의 핵심 정보를 탈취하려 할 때 쓰는 수법과 유사하다.
대만 검찰은 “대만 반도체업계의 국제 경쟁력을 심각히 위협하는 사건”이라며 관련 엔지니어 3명에게 각각 징역 14년, 9년, 7년을 구형했다. 대만은 산업 스파이 행위를 특히 엄격하게 처벌하는데, 지난 2022년부터는 국가안보법까지 적용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를 단순 먹거리가 아닌 안보의 영역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핵심 기술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대만과 비슷한 처지다. 현재 한국의 주요 경쟁사는 단연 중국인데, 삼성디스플레이가 BOE와 소송전을 벌인 것처럼 기술의 탈취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유출된 산업기술의 65%가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한국의 핵심 산업은 자동차와 반도체, 배터리, 가전 등으로, 이들 대부분이 중국과 겹친다. 그리고 중국과 겹치는 산업군은 저가 공세를 감당하지 못한다. 삼성과 LG가 LCD에서 철수했고, SK하이닉스가 DDR4 생산을 연내에 중단하려 한 게 그 예다.
따라서 국내 기업들은 가격 경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프리미엄’과 ‘초격차’를 내세운다. 가격이 비싼 대신 더 나은 퀄리티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이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다. 중국의 추격이 그만큼 가파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핵심 기술까지 유출되면, 격차를 벌릴 방법이 없다.
고려 말, 문익점은 원나라를 다녀오는 길에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 고려에 가져왔다. 손꼽히는 기술 탈취 사례겠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목화의 유출이 아닌 재배에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고 약 10년 만에 목화는 고려 전역에 퍼져 의류 혁명을 일으켰다. 핵심기술의 유출은 되돌릴 수 없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진다. 기술 유출을 막을 파격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