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금융감독원의 존재감이 부쩍 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금융위원장이 사실상 공백 상태인 가운데 금감원장의 행보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내정자는 인사청문회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공식적 권한 행사에는 제약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찬진 금감원장은 보폭을 넓히고 있습니다.
금융권 최고경영자(CEO) 간담회를 연이어 주재하고, 네이버 등 빅테크 기업 CEO들과도 간담회를 잡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감독 범위를 전 업권으로 넓히는 모습입니다. 홈플러스 사태와 관련해선 MBK파트너스에 제재 절차에 본격 착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일 이억원 금융위원장 내정자 청문회에서도 이찬진 원장의 행보에 대한 질의가 많았습니다. "금융감독원장이 금융권 CEO 간담회를 주재하는데 금융위원장도 그렇게 한 적 있는가", "금감원장이 금융위원장 일을 대신하는 것이냐" 등의 질문이 이어졌는데요. 의원들이 세간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금융위원장을 '바지사장', '허수아비'로 보인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이억원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의원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금감원장이 전면에 나서는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지난 윤석열정부 때에도 이복현 전 금감원장이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실세 원장’으로 불렸지요. 당시 금융위원장은 주요 정책 현안에서 '패싱 논란'에 휘말렸고, 감독당국 간 힘의 불균형이 표면화된 바 있습니다.
이재명정부에서 초대 금감원장을 맡은 이 원장은 변호사 출신으로 이재명 대통령과는 함께 사법연수원을 거쳤습니다. 이 대통령의 각종 재판을 변호하기도 한 이력도 있어 단순한 동기를 넘은 사이입니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한 양상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는 이찬진 금감원장의 첫 공식 행보였는데요. 미리 준비해 온 모두발언을 장시간에 걸쳐 그대로 읽는 것으로 언론 공개 시간이 끝나고 별도 브리핑이 없었습니다. 은행권 화두인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과징금 등 취재진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았고 퇴장했습니다.
금융위원장이 사실상 부재인 데다 금융감독 체계 개편 작업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불필요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성급한 발언을 삼가겠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1일 열린 보험업계 간담회에서는 사뭇 다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금감원에서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백브리핑이 없다고 당초 공지했지만, 이 원장은 간담회가 끝난 뒤 이례적으로 백브리핑을 자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원장은 삼성생명의 회계 처리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며 시정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삼성생명 회계 처리에 대한) 방향은 잡은 상태고 시간 끌지 않고, 금감원 입장을 정리를 하기로 했다"며 "국제회계기준에 맞춰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일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보험회사 CEO 간담회에서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삼성생명은 과거에 판매했던 유배당 보험 회계 처리 방식을 놓고 최근 다시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삼성생명은 현재 과거에 판매했던 유배당 보험의 계약자 배당 몫을 보험사가 갚아야 할 부채나 자본이 아닌 '계약자 지분 조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3년 도입한 새로운 국제회계기준(IFRS17)은 유배당 보험을 보험 부채 또는 자본으로 처리하게 돼 있는데, 이와 달리 적용하는 회계 방식입니다.
삼성생명이 이른바 '일탈 회계'로 불리는 이런 회계 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과거 금감원의 유권해석 때문입니다. 이 원장은 이날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과거 유권해석을 뒤집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발언은 업계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임 금감원장이 과거 은행권 '때리기'를 통해 대출금리 인하와 상생금융 확대를 이끌어낸 기조가 이제는 보험업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 원장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참여연대에서 경력을 쌓은 인사로, 금융권에서는 그가 재벌 대기업을 키워드로 한 강도 높은 감독을 펼칠 가능성에 주목해왔습니다. 삼성그룹은 한국 보험산업의 핵심 기업이자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만큼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일벌백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삼성생명을 둘러싼 과거의 불완전판매 논란, 회계 처리 논쟁, 그리고 보험계약자의 권익 문제 등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 원장이 이를 계기로 보험사 전반에 대한 고강도 검사와 제재를 확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금융감독원의 존재감이 부쩍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모습. (사진=뉴시스)
삼성생명을 비롯한 대형 보험사뿐만 아니라 중소 보험사까지도 금감원의 현미경 검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험업계의 부담이 과중해지거나 특정 기업을 겨냥한 정치적 색채가 짙어질 경우 시장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금감원장의 행보가 일방적인 '때리기'로 흐를지, 아니면 제도 개선을 동반한 건설적 감독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결국 관건은 금융위원회와의 관계 설정과 금융감독 체계 개편인데요. 두 가지 향방에 따라 이 원장이 감독권을 어떻게 행사할지 구체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 내정자는 2일 인사청문회에서 내정자 신분으로 정책 방향을 밝히기 어렵다며 대부분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이 원장의 행보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금융위와 금감원의 상하 관계를 다시 상기시키는 듯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이 내정자는 "금융감독정책, 금융정책은 절대적으로 금융위원장의 소관"이라고 한 것입니다. 금감원은 금융위의 위임에 따라 금융사의 검사 및 감독 업무를 집행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내정자의 발언은 금융위와 금감원의 힘겨루기가 다시금 불거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읽히는데요. 감독 체계 개편을 앞둔 지금, 그 관계 위에 드리운 암운이 단순한 착각이길 바랄 뿐입니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