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8000억원 규모 배드뱅크 설립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기 연체된 무담보 개인 채권을 모아 소각하거나 조정하는 방식으로,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의 경제 회생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상은 7년 이상, 5000만원 이하 채무로 약 113만명·총 16조4000억원 규모입니다.
일부에서는 '상환을 미루는 행태'를 우려하지만, 한국의 신용 시스템은 채무불이행자에게 극단적으로 엄격하게 작동합니다. 이들은 금융거래는 물론 취업, 공공임대주택 청약, 정책자금 이용 등에서도 배제되며, 사실상 경제적 퇴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소비자이자 노동자, 납세자인 이들이 사회 시스템에서 제외되는 것은 큰 손실입니다.
대상 채권은 대부분 금융기관 내부에서도 회수가 불가능한 부실자산입니다. 정부는 이를 할인 매입할 예정이며, 실질 투입 재원은 8000억원 수준입니다. 소비 회복과 세수 증가 등을 고려하면 중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됩니다.
정상적인 파산·회생 절차도 한국에서는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법률대리인 없이 절차를 밟기 어렵고, 비용 부담도 큽니다. 반면 미국은 자동 면책 제도와 낮은 수수료 체계를 운영하며,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주택담보대출상환조정제도(HAMP)를 통해 채무자 회생을 적극 유도했습니다.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도 위기 후 가계 부채 구조조정을 병행한 바 있습니다.
이는 기업 구조조정과의 형평성 문제로도 이어집니다. 정부는 대우조선해양, 한진중공업, 한진칼 등에 수조원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이들 자금의 회수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기업은 '시스템 리스크 방지'라는 명분으로 구제하면서, 개인에 대한 채무 감면을 '과도한 시혜'로 보는 시각은 재고가 필요합니다.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도덕적 해이 방지와 구조조정의 병행이 필요합니다. 장기 연체 채무자를 다시 소비자이자 납세자로 복귀시키는 일은 단순한 탕감이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투자입니다. '성실 채무자와의 형평성' 문제는 자동 면책 제도 등 제도적 보완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대다수 성인은 카드값, 학자금, 주거비용 등으로 일정 수준의 빚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고나 질병, 실직 등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으며, 신용불량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닌 사회적 리스크입니다. 이제는 채무자를 낙인찍기보다 재기의 사다리를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회생법원 모습. (사진=뉴시스)